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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 대한 일본의 진출 본문

역사/베트남의 역사

베트남에 대한 일본의 진출

무량수won 2009. 8. 20. 08:05
1940년 6월 인도차이나 반도에 일본의 진출이 시작된다. 유럽에서 프랑스의 열세로 인해 일본은 중국 충칭으로 들어가는 물자 반입로인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국경을 폐쇄할 것과 감시를 위한 군사 사절단의 입국을 허용해 줄 것을 인도차이나 총독에게 요청하게 된다. 이에 총독은 요구를 받아 들여 일본의 진출이 시직된 것이다.

1940년은 1937년에 일본이 중국 본토에 진격을 시작으로 벌어진 중일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이다. 때문에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물자들에 대한 차단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고 그에 대한 방법으로 베트남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모든 국경을 봉쇄한 것으로 생각된다. 더불어 1939년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1940년 4월이 되면 프랑스를 제압한 이후의 상황이다. 때문에 프랑스의 통치를 받던 인도차이나 정부도 일본의 군사적 위협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8월이 되지 이번에는 군대가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주할 것과 비행장을 요구하게 된다. 이에 프랑스는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9월 22일 협약을 했지만 일본군은 중국 남부에 주둔하던 부대를 베트남으로 진격시키고 프랑스 군은 제대로 반격해보지도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던 베트남복국동맹회 등의 단체들이 봉기를 하며 프랑스를 공격하게 되고, 일본의 지원을 등에 업고 그 규모가 커졌다.

곧 일본은 공격을 멈추었지만 베트남인들의 공격은 지속 되었다. 10월이 되자 프랑스는 일본의 동의를 얻어 봉기했던 베트남 인들을 1개월 만에 진압을 하게 된다. 여기에 1939년에 사이암에서 타일랜드로 국명을 바꾼 타일랜드 정부는 프랑스의 압력에 의해서 캄보디아에 할양했던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며 캄보디아와 라오스 변경을 침입하게 된다.



< 현재 인도차이나 반도 : 구글 어스에서 당시의 타일랜드는 태국으로 표기 되어 있다. >



타일랜드와 캄보디아 사이의 전쟁을 이용해 혁명을 일으키기로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남부위원회가 감행하게 되는데, 이는 중앙 위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선 것이었다.

문제는 예정된 날짜 직전 프랑스가 이들의 움직임을 알게 되었고 베트남인 병사들은 무장해제를 당한다. 이에 대한 연락이 되지 않은 쩌 런을 비롯한 8개 지역에서는 예정대로 폭동이 일어나게 되고, 프랑스인 지주를 재판하는 혁명위원회를 설치하게 된다. 이 당시 현재의 베트남 국기가 나부끼게 된다. 이들의 움직임에 프랑스는 기갑부대와 비행기를 동원해서 진압에 나서 정리가 된다.

1941년 5월 응우옌 아이 꾸옥은 베트남 독립 동맹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들이 후에 베트민으로 줄여 불리게 된다. 더불어 이들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연합국을 지지하는 선언을 발표하기도 한다.

출처 :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 유인선 , 이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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