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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베트남의 역사

베트남을 만들다. 응우옌 푹 아인

무량수won 2009. 4. 29. 15:40

1786년 7월 아드란 주교인 피뇨 드 베엔(Pigneau de Behaine, 1741 ~ 1799)이 응우옌 푹 아인의 아들 까인을 데리고 인도 퐁디셰리(Puducherry)를 떠나 프랑스로 떠난다. 피뇨 드 베엔은 까인과 함께 루이 16세를 만나 베르사유에서 조약을 맺게 된다. 1787년 2월에 프랑스에 도착해서 조약은 11월이 되어서야 맺어지게 되었다. 이들이 루이 16세를 만나는 것 부터가 어려웠기에 9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 조약의 내용 >
프랑스 왕은 4척의 군함과 완전무장한 군인 1,650명을 코친차이나(현재의 베트남)연안에 파견한다.
이에 대한 대가로 코친차이나 왕은 다 낭 만과 콘 썬(昆山) 섬을 프랑스에 할양한다.
유럽인 가운데 프랑스인에게만 무역에 자유를 허용한다.


이 조약을 인도 주둔군 사령관인 토마 드 콩웨(Thomas Comte de Conway)백작에게 위임했다. 백작은 아드란 주교와의 의견충돌로 인해 현실적으로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를 들어 조약에 대한 반대의사를 밝혔다. 이런 그의 의견은 1788년 베르사유 궁정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국가 재정이 많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움직임이 보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 7월 14일에 일어나게 된다.)

1787년에 응우옌 푹 아인에게 희소식이 들리게 된다. 떠이 썬 당에서 형제들끼리의 내부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응우옌 푹 아인은 메콩강 하류에 있는 롱 쑤엔(龍川, Long Xuyen)으로 가서 근거지를 삼는다. 여기서 그는 지원자와 떠이 썬 군의 이탈자, 중국인 해적, 캄보디아 용병등을 모아 군대를 급성장 시킨다.

1788년 프랑스와의 조약이 깨어졌지만 아드란 주교 피뇨 드 베엔은 멈추지 않고 응우옌 푹 아인을 돕기위해 자금을 마련하기위해 나선다. 어느 정도 마련한 자금을 바탕으로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하고, 의용병 300명을 모집하여 응우옌 푹 아인에게 보낸다. 피뇨 드 베엔과 까인은 1789년 7월에 코친차이나에 도착하게 된다. 응우옌 푹 아인은 이를 바탕으로 9월 쟈 딘을 탈환하고 1789년 까지 쟈 딘 지방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응우옌 푹 아인은 1790년 3만의 병력을 모으기에 이른다. 그들은 새로운 장비와 대포를 제작하였고, 서양인에게 전함과 총포를 구입했다. 이로써 떠이 썬 당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게 된다. 1799년 7월에는 꾸년 성을 점령하고 응우옌 푹 아인은 사이공으로 돌아오게 된다. 떠이 썬 당은 꾸년 성에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한다. 꾸년 성의 사람들은 17개월 동안 항전을 하였지만 결국 1801년 5월에 함락을 당한다. 

응우옌 푹 아인은 1801년 6월 푸 쑤언(Phu Xuan, '후에' 라고도함)을 공격 하여 함락시킨다. 떠이 썬당은 북으로 쫓겨 났다가 재정비 후 다시 공격을 하지만 응우옌 푹 아인의 해군력에 의해 패하게 된다. 1802년 3월에는 꾸 년 성을 다시 탈환하게 되고, 예전 응우옌 씨와 찐 씨가 대립하던 시절에 응우옌 씨 영역인 린 강에서 캄보디아 접경에 이르는 영토 전부를 다시 아우르게 되었다.

1802년 6월에는 북진을 준비하고, 그전에 쟈 롱이라는 연호를 정한다. 쟈 롱은 쟈 딘에서 탕 릉까지라는 의미로 베트남 전 영토를 의미하는 말이다.

결국 7월 20일에는 탕 릉에 입성하게 되었고, 현재 베트남의 영토를 포괄하는 최초의 왕조가 되었다.

이후 청나라에 사절을 보내 국왕으로 봉해 줄 것과 국호를 옛 국가 이름인 남 비엣으로 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청나라는 비엣 남으로 제시하였고, 이에 응하여 오늘날의 베트남이란 국명이 생기게 되었다. 남 비엣은 옛날 중국의 광둥과 광시를 포함했던 국가 남 비엣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비엣 남으로 바꿔 제시하였던 것이다.

출처 : 새로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 지음, 2002년 이산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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