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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outsider의 생각누리
민족이란 무엇인가? 이 글은 역사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민족이라는 개념과 내가 블로그를 통해서 사용하게 될 민족이란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한 글임을 미리 밝힌다. 민족이란 단어는 한자로 "民族" 이렇게 표현이 된다. 民(민)이란 백성을 뜻하는 한자로 보통 나라의 구성원을 뜻하는 한자다. 族(족)이란 무리를 뜻하는 한자로 두명 이상의 혹은 두개 이상의 수를 에둘러 표현한다. 族(족) 이란 글자의 뜻에 '겨레'가 들어가지만 한자의 활용상 한국어 사전에서 정의하는 겨레의 의미 보다는 무리의 의미 활용이 많기 때문에 제외한다. 다시 말해 큰 범위로서는 '무리', 작은 범위에서는 '혈연관계'쯤으로 보면 좋을 듯 싶다. 따라서 역사책에서 표현되는 민족의 의미는 작게는 핏줄로 이어진 즉, 상당히 유사한 DNA구..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잡담 조차도 쉽지 않은 것이 내 입장이다. 왜냐면 우선 나 자신이 역사에 관해서는 전문가인 척 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그놈의 쓸데없는 자부심이 이런 저런 자료를 들고와서 "자 봐봐! 내가 이런 저런 근거로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라고 꼭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까짓 잡담 정도는 그딴거 없이 내 생각을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댓글을 기다려도 되는데도 말이다. 혹여 내가 잘못 된 사실을 혹은 어긋난 주장을 보고 글을 적었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고치거나 덧붙이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면 되는데도 말이다. 그것이 블로그가 가진 장점인데도 3년 넘게 사용하면서 썩 역사부분에 관련되서는 유용하게 활용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은근히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도 있다. 뭔가 완성..
아테네에 대해서... 뜬금없이 왜 아테네인가 하면, 봉봉이님의 추천(?)으로 요즘 도널드 케이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만약 내가 역사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다면, 정말 재미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배경 이야기를 알고 보는 나도 좀 지루한 편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도통 무슨 소리인가 싶겠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이나 글 자체에 대한 문제는 크지 않다고 본다. 어짜피 이 책을 낸 사람들은 대중을 노린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다르게 말하면 학부생 정도의 지식(?)쯤을 보유한 사람들을 노린 것일 테니까. 이건 다른 말로 하면 역사에 대해서 상식 이상의 지식수준을 갖췄다는 이야기로 풀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역사 덕후..
역사에 관한 잡담은 언제나 그렇지만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우선 명확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가려내야 하고, 인용하는 학자의 명성도 꽤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명성이란 그 학자의 유명도에 대한 것이 아닌 얼마나 사료에 대한 검증을 거치고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는가하는 점을 말한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의 최근 오보처럼 하지도 김정남이 꺼내지도 않은 천안함에 관한 말을 마치 김정남이 꺼냈던 것 처럼 꾸미는 짓따위를 하느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번 포스팅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한홍구는 얼마나 믿음직한 학자인지 부터 검증을 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 될 것이다. 내가 바라본 한홍구는 1970년대를 넘어오기 전 역사에 대해서는 꽤 괜찮게 평가하고 싶다. 비록 내가 읽은 그의 저..
1947년 11월 29일 뉴욕. 국제연합 총회는 팔레스타인 영토를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국제관리체제 하에 두기로 하는 안을 통과 시켰다. 유대국가 – 56% , 아랍국가 – 44%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이집트, 요르단과 함께 나눠먹고 국토 면적을 1/3가량 늘렸다. 그리고 80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살던 곳에서 떠나야 했다. 이집트는 가자지구. 요르단은 웨스트뱅크. 이후 20년이 지나는 동안 두 번의 전쟁이 벌어졌고, 1967년 6월 이스라엘은 웨스트뱅크, 동예루살렘, 가자지구를 차지했다. 이는 곧 식민지화로 이어졌고, 우파가 정권을 잡자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1977년 이 지역에 5천명이었던 유대인 정착민 수는 1992년 12만 명(동예루살렘 제외)에 이르른다..
고구려는 무식하게 힘만쎄고 땅떵이만 큰 나라였을까? 흔히 고구려라고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다. 역사를 배울때 국사책에서 강조하는 왕이나 TV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이 이미지 이상은 아니었다. 아 태왕사신기란 드라마에서 배용준이 고구려에 대해 부드러운 이미지를 가지도록 해주긴 했지만 음... ㅡㅡ;;; 고등학교 국사책에 쓰여진 고구려의 주요 사건을 시간 순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세기 후반 왕위 안정 및 독점세습 2세기 후반 고국천왕.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중앙집권강화 3세기 위나라에 의해 위축 4세기 중국의 분열로 팽창. 소수림왕. 율령반포 불교 공인. 태학성립. 5세기 광개토 대왕 대규모 정복 한반도 남부까지 영향력 확대. 장수왕 평양으로 도읍이동(427년) 6세기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고조선이란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중에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누가 뭐라해도 위만의 조선이 들어선 것이라고 할 것이다. 단군왕검 이야기는 이미 신화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실질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확인된 역사적 사실 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사건은 위만조선이야기 뿐이다. 문제는 실질적으로 국사를 배울때 위만조선에 대한 것은 그리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건 한반도에 살던 민족이 아닌 민족에 의해서 지도자가 바뀌었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뭐 지금은 어찌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배울때는 그냥 위만이란 녀석이 중국애들 데리고와서 괴씸하게도 왕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이정도였다. 2002년 개정된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하나의 단락으로 구성되어서 나름 소제목도 달고는 있기..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단군과 고조선 부분에서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단군왕검이 건국했다는 것과 고조선의 영토를 예측할때 쓰인 것이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중국 대륙에서 진나라와 한나라가 바뀌던 혼란한 시절에 위만이란 사람이 한반도쪽으로 와서 당시 고조선의 왕이었던 준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었서 그 나라를 위만조선이라 부른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이 중에서 위만조선에 관한 것은 학교에서는 잘 알려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인정해서 내용을 넣는다고 해도 통치자가 중국에서 넘어와서 왕권을 빼앗았으니 그냥 나쁜놈 정도로 인식하고 넘어 가지 않을까 싶다. 내가 보고 있는 국사책은 2002학년도 부터 시행된 7차 교육과정의 교과서다. 만약에 이부분에서 시험문제를 낸다면, 중..
가끔씩 벌어지는 일이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에 경제가 발전했으니 모두 박정희 덕이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같은 논리로 일제 시대에 개화가 되었으니 모든 것이 일본의 덕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런 논리라면, 누군가 이글루스에서 댓글로 써놓은 것 처럼 인터넷을 우리가 쓸수 있는 것은 모두 김대중 때문이란 결론이 나온다. ㅡㅡ;;;; 정말 이런 이상한 논리로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을 보면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된다. 한때 경제학을 하는 교수 몇명이 일제 강점기 시대에 발전은 모두 일본 덕분이었다면서, 증거자료로 당시의 경제지표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일본이 강점 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개방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지금의 성장이 있었겠느냐하는 것이다. 내가 예전에 역사 관련된 포스팅에서..
오늘의 모험은 [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 입니다. 클레오파트라라... 코가 1Cm만 달랐어도 세상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의 주인공이며, 우유로 목욕을 했다고 하며, 역사상 미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여인을 말하는 것 맞습니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에게 아들이 있었다고? 이게 무슨일이지? 클레오파트라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것은 왠지 익숙치 않네요. 어서 알아보러 가봐야겠습니다. " 뭐 무량수라고? 나는 자네 이름을 처음 듣는데? " " 아... 죄송합니다. 제가 마르세이유에서만 생활했었는데, 아테네에서 와서 그 버릇을 못버렸네요. ^^;;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무량수라고 하는 모험가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 " 흥, 신출내기 모험가구만. 자네에게 줄 일은 없으니 돌아가게나 " " 중개인 아저씨 정말 죄송..
요즘 이글루스에는 꾸준히 환단고기에 대한 논란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옹호하고 누군가는 열심히 깨부수고... 뭐 그렇게 되고 있지요. 주로 환단고기에 대해서 옹호하는 쪽은 재야사학이다. 주류가 아닐 뿐 엄연히 우리 역사라며 주장하고, 환단고기의 환상을 깨려고 하는 사람들은 객관적인 증거가 안되는 것으로 과대망상을 키우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 이런 글을 쓰는 저는 환단고기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말합니다. 예전에 역사스페셜에서 한번 다뤘지만 한국의 역사로 받아 들이기에 너무나 뒷받침하는 자료가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확실히 존재 했는데 누군가의 의해서 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가설일 뿐이지요..
조선의 권력 흐름 신진사대부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남인,북인,서인 ▶ 북인 ▶ 서인 ▶ 노론,소론 ▶ 노론 ▶ 세도정치 조선 관료의 분열 사림파 ▶ 동인, 서인 동인 ▶ 남인, 북인 서인 ▶ 노론, 소론 1392년 신진사대부들에 의해서 조선이 건국된다. 당시 조선건국에 반대하던 고려의 관료들은 지방으로 내려간다. 이들이 후에 사림파가 된다. 조선의 건국을 도운 이들을 보통 훈구파라 한다. 이들은 문정왕후가 죽기 전까지 조선의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후 선조의 등극으로 사림파가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1575년 선조 8년에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된다. 1589년 선조 20년에는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면서, 남인과 북인 그리고 서인의 균형이 맞아가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 ..
이 글은 춘추 전국 시대의 유교, 보통 선진유교라 불리우는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참고가 되었던 책의 내용이 많이 발췌되어 있으나 원본의 글을 제가 작성한 것이 아닌지라 지금은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ㅜㅜ 원래 대학 수업에서 발표를 위해서 작성된 것이며, 선진 유교에 대해서 개념잡기용으로 사용될 정도는 되나 깊은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조금 내용이 부족합니다. 원본 글에는 없는 내용을 제가 임의 대로 추가 시킨 것도 있고, 중간 중간 표현을 많이 바꾸었으나 원래 글의 중심은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혹시 이글을 읽으시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사실이 있거나 잘못된 사실이 있다면 바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불어서 글을 읽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댓글에 질문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
포르투갈은 꽤 좁고 답답한 나라이다. 왜냐면... 이베리아 반도라는 곳 한 구석에 몰려 있기에 그렇다. 포르투갈이 교역을 하려면 스페인을 거치거나 배를 타고 빙~ 돌아야 하는 상황이다. 구글어스로 살펴봐도. 딱히 육상으로 스페인 외에 다른 나라와 이어진 길이 없음을 알수가 있다. 때문에 포르투갈 역사이야기에 스페인이 빠질수 없고, 스페인 역사 이야기에 포르투갈이 빠질 수가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 나라에서 항해술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포르투갈에서 항해술이 발달하던 시기에는 모든 유럽에서 항해술이 발달하고 있었을 테니까. 다만 주변의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배를 통해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욕망이 강했을 지는 모른다. 이런 포르투갈이 큰 업적을 하나 세우게 된다. ..
청동기는 그 시대를 말하기에 조금 에매한 부분이 있다. 석기시대도 그렇고 뒤에 사용되는 철기시대도 그렇지만 무기에만 이것들을 사용 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활의 기본이 되었던 농기구에서도 사용이 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청동기는 다르다. 무기나 제사용품에는 사용이 되었지만 농기구 같은 생활의 기본이 되는 곳에서는 사용된 예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내가 읽어본 자료들에서는 농기구로 청동기가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그래도 이 청동기는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있다. 처음으로 같은 종류의 금속이 전 지구적으로 광범위하게 쓰였다는 점이다. 처음 사용된 금속이 따로 있겠지만, 지구라는 행성 전반적으로 쓰인 비슷한 종류로는 청동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당연히 지구라는..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역사라는 것은 참 다루기가 까다롭다. 조금만 잘못 표현해도 여기저기에서 질타를 받을수 있고, 조금만 잘못 표시해도 욕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물론 학부밖에 졸업하지 못한 비 전문가이지만,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이 역사에 대해서 가볍게 쓴다는 것이 왠지....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왠지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철저하게 사실을 고증해서 사실만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머리 속에서 샘솟기 때문이다. 뭐 구석진 블로그에다가 끄적거리는 주제에 쓸데없이 신경쓰는 것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서 이런 저런 부담감을 지니고, 여러가지의 느낌으로 글을 써보았다. 다분히 학술적인 느낌부터 시작해서, 자료 나열식도 해보기도 하고 웃기게 써보기도 하고...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오늘의 모험의 [ 명장군의 지휘봉 ] 입니다. 명장군이라.... 언뜻 떠오리면 이순신 장군??? 아.. 한국이 아니지. 그러면, 사막의 여우 롬멜? 나폴레옹? 이 사람들은 너무 후대 사람이로군.. 분명 고대 사람일텐데. 그럼 고대 시대에 유명한 장군이라면, 시저!!! 인건가? 일단 이야기 먼저 들어봐야 겠군요. ^^; " 무량수군~ 오늘도 일이 있다네~ " 아.. 오늘도 반겨 주시는 마르세이유의 모험가 조합 아저씨 입니다. " 네!!! 갑니다 가요. " " 자네 알고 있는 유명한 장군을 알고 있는 사람 있나? " " 글쎄요? 제일 잘 알려진 장군이라면... 시저 정도?? " " 음.. 이번 장군은 시저는 아닌듯 싶네그려. 북아프리카 쪽으로 가봐야 하거든. " " 시저는 갈리아 지방을 정복한 것으로 유명하..
종교 단체인 까오다이 교와 호아 하오교는 일본과 손을 잡고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다. 더불어 비밀결사에 가까웠던 다이 비엣이란 정치 단체도 이들과 같은 의도로 일본에 협력을 한다. 일본에게 있어서 이들 모두는 필요하지 않았다. 까오다이 교를 제외하고는 그 규모가 매우 작았기 때문이다. 까오다이 교에게는 약간의 지원을 통해서 그들 아래에 두었지만 다른 단체에게는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다. 이들과는 다르게 베트민은 프랑스 식민 정부와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삼는다. 1942년 8월 응우옌 아이 꾸옥은 연합군과의 협력을 모색하기 위해서 " 호 찌 민 " 이란 가명을 사용해 중국의 국민당 계열 군벌인 장파구이(張發奎,장발규)에게 접근한다. 장파구이는 호찌민을 체포하고,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 혁명 동맹회를 ..
1940년 6월 인도차이나 반도에 일본의 진출이 시작된다. 유럽에서 프랑스의 열세로 인해 일본은 중국 충칭으로 들어가는 물자 반입로인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국경을 폐쇄할 것과 감시를 위한 군사 사절단의 입국을 허용해 줄 것을 인도차이나 총독에게 요청하게 된다. 이에 총독은 요구를 받아 들여 일본의 진출이 시직된 것이다. 1940년은 1937년에 일본이 중국 본토에 진격을 시작으로 벌어진 중일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이다. 때문에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물자들에 대한 차단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고 그에 대한 방법으로 베트남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모든 국경을 봉쇄한 것으로 생각된다. 더불어 1939년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1940년 4월이 되면 프랑스를 제압한 이후의 상황이다. 때문에 프랑스의 통치를 받..
오늘의 모험은 [ 묻혀있는 로마 유적 ] 입니다. 지중해 구석 구석에 남아있는 로마의 유적들 ... 만약에 말이지요. 이 로마를 주제로 실제 여행을 다닌다면 얼마나 걸리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볼수가 있을까요? 가끔씩 드는 생각이지만 이 대항해시대에 관련된 포스팅이 끝나고 유럽에 여행을 간다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수 있을 것만 같은데요. 한국인을 대상으로 유럽여행 가이드를 해볼까나 ㅡㅡ;;;; " 어이~ 무량수군! 그동안 어디 갔었던 거야. 자네를 후원하려고 하던 분이 한참을 찾았었네. 이제 자신을 밝혀도 되겠다 싶었는지 찾아다니셨었는데 말이야... " " 요즘 제가 다른 것에 좀 빠져 있었거든요. 그래서 잠시 자리를 비웠었습니다. ^^; 죄송해요. 그럼 후원자분은 지금 어디계시는데요? " " 그분이야..
오늘의 모험은 [ 고대로마의 도시흔적 ] 입니다. 이러다 정말 고대 로마 전문가가 되겠습니다. 지속적인 로마 관련 포스팅이군요. 이렇게 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제가 플레이 하는 무량수라는 케릭터의 능력치는 높지 못합니다. 이제 막 시작한 케릭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지요.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케릭터가 돌아 다닐수 있는 영역을 명성치 별로 배치를 했습니다. 명성치가 낮으면 근방의 해역만 돌아다닐 수 있지만 높아질 수록 돌아다닐 수 있는 해역이 늘어나는 것이지요. 지금 현재 무량수가 돌아다닐 수 있는 영역은 지중해와 북해입니다. 무량수 케릭터가 항상 퀘스트를 받는 마르세이유란 도시의 위치가 고대 로마 제국의 영토 이기도 했구요. 이 대항해시대란 게임의 배경이 되는 16 세기 이후의 유럽에서는..
1930년 10월 베트남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개명한다. 그렇지만 1931년 4월에 이르러서야 코민테른의 정식 지부가 된다. 1930년 2월 베트남 각지에서는 북부와 중부를 중심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자발적인 파업과 시위가 전개된다. 이후 응에 - 옌 소비에트가 형성된다. 소비에트는 원래 평의회나 대표자 회의를 의미하는 러시아어이다. 러시아 혁명이후 국민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소비에트가 생기면서 후에 노동자 계급을 위한 조직체의 의미 정도로 변화된다. 이런 파업은 1930년 9월 응에 안 성과 하 띤 성의 농민 소요가 절정에 다다르고 국가 행정기구는 마비된다. 공산당은 이를 이용해 각지에 소비에트를 수립한다. 즉 농민과 노동자들의 평의회가 수립이 된 것이다. 이들은 토지 ..
오늘의 모험은 [ 기사단의 저주 ] 입니다. 세번째 템플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아비뇽의 소문으로 시작 된 이 모험은 기사단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 기사단의 저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템플 기사단과 필립 4세의 이야기인데요. 무슨 이야기가 더 남아 있는지 한 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무량수군 오자 마자 일을 또 시켜야 해서 미안하네, 지난 번에 아비뇽에 관한 이야기 조사했었지? 아직 그 이야기가 마무리 되지 않은 모양이야. 좀 더 알아봐 줘야겠어. 해줄수 있지? " " 네, 물론 어렵지는 않은데요. 아직 조사가 덜 된 것이었나요? 무슨 이야기가 더 남은 것이지? 알겠습니다. 당장 알아보러 가볼께요. " 어떤 이야기를 아직 못들은 것일까요? 일단 지난번에 방문한 교회를 방문..
오늘의 모험은 [ 피에 굶주린 폭군 ] 입니다. 벌써 세번째 폭군이군요. 특별히 로마의 폭군에게 매력을 느껴서 이러는 것은 아니구요. 어찌 하다보니 폭군 쓰리즈가 되어 버렸네요. 이번 폭군은 누구일까요? 제목 참... 피에 굶주린 폭군이라. 무슨 육식 동물도 아니고 섬뜩하게시리.. " 여~! 어서오게나 오늘은 자네한테 후원자를 소개 시켜주려고 했는데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할 의뢰가 들어왔다네. 일단 이 일 먼저 처리해주게. 소개 시켜줄 후원자도 급한일 때문에 북해로 갔다네. 자신이 직접 소개하겠다면서 미리 알려주지도 말라고 하더군. " ㅡㅡa " 네 ㅡㅡ;; 어쩔수 없죠. 오늘 일은 어떤 일인가요? " " 오늘 일도 로마쪽 이야기일세 누구의 농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한테 자꾸 로마쪽 일이 들어오는구만. 이..
오늘의 모험은 [ 오현제의 대리석상 ] 입니다. 대항해시대 온라인 안에서의 마르세이유는 좀 썰렁~ 합니다. 특히 제가 요즘 접속하는 디케 서버 속 마르세이유는 마을에 한명 내지 두명이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서버 자체에 사람이 좀 없는 편이기도 하지만 인도나 카리브 해를 오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르세이유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모험가 의뢰 중개인 아저씨의 안색도 좋아 보이지는 않더군요. " 어서오게나. 오늘도 일이 있긴 한데말이야.... " " 아저씨,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나요? " " 다름이 아니라 이제 자네에게 줄 일거리가 많이 줄었네, 생활비도 건지지 몰할게야.. " " 헛!!!! 어찌 이런 일이... 혹시 이 근방 경기가 좋지 않다던데, 그 이유 때문..
오늘의 모험은 [ 폭군과 조각상 ] 입니다. " 저기.... 당신이 무량수씨 이신가요? " " 네 제가 무량수 입니다만... 무슨 일이신가요? " " 아 맞군요! 모험가 의뢰 중개인들 사이에서 당신 소문이 좀 돌아서, 뭐 좀 부탁하려고 합니다. 이야기 들어주시겠어요? " " 헛! 혹시 안좋은 소문이라도 ㅡㅡ???? " " 아니에요. 좋은 소문이랍니다. 부탁을 들어주실수 있으세요? " " 휴... 다행이군요. 네, 뭔지 모르겠지만 말씀해보세요. " " 저는 마르세이유에서 활동중인 상인 길드의 수장을 맡고 있는 무량화 라고 합니다. 부탁은 이번 모험 끝내고 오시면 의뢰인에게 보고하지 마시고 저에게 그 정보와 물건을 파시겠나요? 의뢰인이 제시하는 금액에 3배를 드리도록 하지요. " " 세....세배요? 그렇게..
오늘의 모험은 [ 고대 로마 황제의 부조 ] 입니다. " 무량수군! " " 네? " " 자네 이번에도 로마와 관련된 일좀 맡아줘야 겠네 " " 어... 그러면 지난번 의뢰와 연결된 일인가요? " " 아니 이번에는 좀 다른 일일세. 한 번 해보겠나? " " 네. 뭐 해보라고 하시면 해야지요. 대신에 나중에는 꼭 비싼 일 좀 부탁드려요. 요즘 생계를 유지하기가... ㅜㅜ " " 일을 하다보면 이쪽 분야에서 소문이 날테니 조금만 참고 열심히 해주게나. 거금이 들어가는 일은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명성이 있어야 나도 자네를 추천할 수 있지 않겠는가? " "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에 일에서 조금만 돈을 올려주시면 안될까요? " " 알겠네 이번에는 조금 올려줌세 " " 감사합니다. ^^/ " 저의 몸값이 조금 올랐습..
1923년에 만들어진 '떰 떰 사'라는 단체는 급진적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중에 하나였다. 이들은 인도차이나 총독 암살을 기도했었다. 이 암살시도는 실패하였으나 이들의 행동은 반식민주의 투쟁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왔다. 이런 급진적인 '떰 떰 사' 회원을 흡수하여 새로 창립한 단체가 바로 1926년 6월에 만들어진 '베트남 청년 동지회'이다. 후에 '청년'으로 약칭되는 이 단체는 호치민이란 이름으로 알려지 응우옌 아이 꾸옥이 만들었다. 이들은 이념을 바탕으로 조직되었다. 경작하는 사람이 땅을 소유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사회 혁명적이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단체이다. 이들의 영향력은 베트남 전역에 걸쳐서 나타났으며, 해외에서까지 영향력이 미쳤다. 겉모습은 그렇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베트남 최초의 공산주의 ..
오늘의 모험은 [ 폭군 네로상 ]입니다. 요즘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모험을 좀 처럼 못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오랫동안 모험가 의뢰 중개인 아저씨 못봤더니 아저씨가 매우 반갑게 저를 맞이해 주시더군요. " 어이 무량수군!! 오랜만이야. " " 아! 아저씨 알아봐 주시는군요. ^^ " " 내가 자네를 반가워하는 이유는 지난번 수도원장의 부장품 일을 잘 처리 해줘서일세. 게가가 이번엔 좀 큰일이 들어왔거든 " " 어려운 일이요? 무슨 일인데 어렵다고 하시는 것인가요 ㅡㅡ? " " 이번일은 공부 좀 해야 하는 일이라서 그렇다네, 혹시 자네 로마제국 시대에 대해서 공부한 적있나? " " 예. 예전에 조... 금요. 깊게는 못했었는데요. " " 그렇단 말이지... 지난 번 미술에 전혀 지식이 없었던 것에 비한다..
쟈 딘 지방의 향신 집안 출신이었던 응우옌 안 닌은 프랑스식 중등교육을 받고 파리에서 법률 공부를한 사람이다. 1922년에 그는 사이공으로 돌아와 기자와 연설가로서의 길을 걷게된다. 1923년 12월 주간 신문인 라 클로슈 펠레(La Cloche felee), 즉 균열된 종(種)이란 의미를 가진 신문을 창간하고 실질적인 발행인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주로 젊은 층에게 국가 장래에 대해 책임을 가지도록 호소하며, 식민 당국을 비판하였다. 다소 온건한 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25년 판 보이 쩌우의 가택 연금 결정을 듣고 구명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식민 당국에 대한 비판 수위도 높아져만 갔다. 결국 1926년 3월에 체포 되어서 18개월 징역을 선고받았고, 판 쭈찐의 장례식이 열리던 3월 24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