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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12.기울어져가는 신라와 후삼국(ver 0.1) 본문

역사/역사잡담

한국사 12.기울어져가는 신라와 후삼국(ver 0.1)

무량수won 2014. 8. 12. 17:05

신라를 시기별로 나누는 방법이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둘다 무열왕(김춘추)를 중심으로 나누는데요. 하나는 무열왕이 되기 전의 신라와 무열왕과 그 직계자손들이 왕으로 있었던 신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열왕 계열이 아닌 왕들과 무너질 때까지 나누지요. 삼국사기에서 이렇게 나누었는데요. 무열왕 전 시대를 상대, 무열왕의 직계자손들이 왕을 하던 시대를 중대, 무열왕이 아닌 자손들이 왕을 하던 시대를 하대라고 합니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좀 다르게 분류합니다. 신라가 시작하던 시기에서 지증왕까지를 상고라하고 지증왕이후 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 그러니까 무열왕 전까 시대를 중고라고 하며, 마지막으로 무열왕부터 신라 멸망까지 하고라고 합니다. 뭔가 정신없어 보이는데요.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은 무열왕이 시대를 구분하는 공통지점이라는 것입니다. 왜 무열왕이냐하면, 신라가 통일되어가던 시기였고 왕으로써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 덕에 무열왕 계열의 자손들이 한동안 왕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게 되죠.


삼국사기에서 분류하는대로 하대, 다시말해 무열왕 계열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신라는 혼란 속으로 빠져듭니다. 무열왕 계열이 왕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왕권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왕권이 약해지면 그만큼 귀족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귀족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서로 자기가 더 잘났다고 싸우게 됩니다.


앞선 글에서는 어떻게 무열왕 계열의 왕들이 강해졌는지를 살펴봤다면, 이 글에서는 무열왕 계열이 물러나고 신라의 왕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더불어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이야기까지 곁들여지지요. 결론적으로는 후고구려 즉, 고려가 모두를 평정하게 되지만요.



무열왕계열 왕의 막강했던 시절이 가고 마지막 무열왕계열 왕인 혜공왕(765~780) 때가 되면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쯤되면 궁금해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한반도를 노리던 당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말이죠. 이런 신라의 혼란이면 당나라가 충분히 한반도를 치고 들어와 "이제 여기 당나라 땅임!"이러면서 선포할만 하거든요. 그런데 신라가 혼란 속으로 빠져들던 당시 중국대륙도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신라가 막강해졌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지만요. 측천무후 이후인 705년이후 당나라는 이런 저런 반란 때문에 혼란스러워지고 907년쯤 무너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니 당이 신라가 있던 한반도에 신경쓸 여력은 없었겠지요.


다시 신라 이야기로 돌아와보죠. 앞서 말한대로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왕권이 매우 약해졌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그 왕자리를 노리는 진골들이 달려들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왕권이 강해지면서 유명무실해지긴 했지만 명목상으로는 어찌되었든 진골에게는 왕위계승권이 있었으니 말이지요. 혜공왕 시절인 780년에 이찬 자리에 있던 김지정의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를 진압한 김양상과 김경신은 이 군대를 몰아 혜공왕을 죽입니다. 그리고 김양상은 왕위에 오르게 되죠. 이 왕이 선덕왕입니다. 선덕왕은 내물왕의 10세손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런식으로 왕위를 가져가면 결국 힘있는 다른 진골들도 자신도 한번 왕이 되어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지요. 그덕에 진골들에 의한 반란이 지속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반란은 결국 나라를 힘들게하고 많은 희생을 치룬만큼 국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국력이 약해진 다는 것은 지방에 대한 구속력도 약해지는 것이고, 그동안 지방에 대한 감시가 약해지면 지방의 힘있는 유지들이 자신만의 세력을 키우게 되지요. 그렇게해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호족입니다. 호족은 뒤에서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죠.


한편, 그동안 신라를 지탱했던 골품제도 많이 무너지게 됩니다. 신라후대 4두품까지는 사실상 평민과 다를 것이 없는 상태까지 가게됩니다. 진골과 6두품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골품제의 의미가 사라지게 된 것이지요.


아래쪽 골품이 무너짐에도 6두품과 진골사이에는 높은 장벽이 존재했습니다. 6두품들이 국학과 당으로 유학을 갔다와 유교지식을 많이 쌓게 됩니다. 그 지식을 바탕으로 행정적 실무도 처리하고, 왕에게 정책에 대한 조언도 많이 하게 되죠. 앞서 말한대로 신라의 골품제는 아무리 실력있는 6두품이라고 하더라도 한계가 존재했습니다. 실력에 따르는 적당안 대우를 받을 수 없으니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나라와는 다르게 골품제가 신분적 상승도 막고 있기도 했구요. 하지만 이들이 적극적으로 신라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들도 결국은 골품제에 의지해서 풍요를 누리던 사람들이고 그 덕에 관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런 신라사회를 바꾼 것은 6두품이 아닌 각 지방에서 성장한 호족들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진골들의 왕위싸움은 지방에 대한 감시를 소홀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지방의 유력자들은 자신의 재산과 군사력 같은 힘을 키우게 되는데요. 이들이 자체적인 세력화 시킨 이들을 호족이라고 합니다. 자체적인 세력화란 결국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자신이 관리하는 땅에서 왕처럼 생활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데요. 행정적 결정권한을 가지고 지역민들에게 조세를 받아 자신의 수입으로 만들고 부역을 징발하는 권한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호족에는 크게 두 유형이 있는데요. 하나는 촌주 출신으로 해당 지방에서 조금씩 세력을 키운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 귀족이었다가 지방관리로 왔다가 눌러앉은 경우 입니다. 청해진으로 유명한 장보고도 형식상으로는 중앙정부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사실상 하나의 호족 세력이었습니다. 


한편, 사상적인 변화도 알아보고 가도록 하죠. 사상이 확연하게 영향을 끼치지 않아보이지만, 사상은 사람들이 행동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 주고 앞서는 사람의 이야기에 동조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전에 쓴 글에서는 교종의 유행을 이야기 했었는데요. 교종 중 화엄종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했습니다. 그 교종의 한계는 교리를 중요시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원효의 노력으로 대중에게도 많이 다가갔지만 그보다 더 획기적인 불교의 종파가 중국에서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선종이었지요. 선종은 경전이 아닌 선을 통해 깨달음에 닿을 수 있다는 개념인데요. 화엄종이 기존 기득권층와 민중을 하나로 묶으려 했던 반면, 선종은 신라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성장했다는 것이 교종과 달랐습니다. 그러다보니 지방의 호족들이 이 선종을 선호하게 되었고, 그래서 9산이 만들어졌죠. 왕건은 이중 황해도 해주의 수미산파를 후원했었습니다.


불교가 직접적으로 신라를 무너뜨리지는 않았지만, 신라 백성들의 민심을 대변해주는 종교였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상적 기반이 백성들이 신라가 아닌 고려를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주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지금 신라는 이상하다. 그러니 지금 체제를 바꿔야 한다. 어떻게 할까? 고려가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고 한다. 그럼 고려 백성으로 살아보자.' 뭐 이런 것이지요. 불교 뿐만 아니라 유학도 이런 사상적 변화에 힘을 실어주었고, 노장사상이나 풍수도참사상도 유행했다고 합니다.



이런 혼란은 진성여왕(887~897) 때가 되면 최고에 닿게 됩니다. 국가제정은 점점 줄어들고, 중앙정부 명령은 지방의 호족들 때문에 제대로 시행도 안되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당나라에서 유학 하다가 관리까지 하다 건너온 최치원이 10여조의 시무책을 제시합니다.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한 방안이었지요. 하지만 제대로 실행도 못하고 현실에 실망한 최치원은 관직을 떠납니다. 


889년인 진성여왕 3년에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때 일어난 초적들이 떼를 지어 지방관아도 습격하고 정부에 반항을 하지요. 이 상황에서 지방 호족들은 이들을 흡수해 자신들의 세력을 본격적으로 키우게 되는데요. 대표적으로 상주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가 있고, 북원(원주)에서는 양길, 죽주(죽산)에서는 기훤, 완산주(전주)에서는 견훤, 마지막으로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 등이 있었습니다. 이 반란군들 중에서 나라의 모습을 갖추는 단계까지 남은 것은 견원과 궁예 뿐이었습니다.


견훤은 상주지방 농민의 아들이었습니다. 신라군에 들어가 서남해 방면의 장수가 되었는데,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자기 밑에 군대를 이끌고 무진주(광주)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후 세력을 완산주(전주)까지 넓혀 892년에 후백제를 건국하게 됩니다. 서남지방 각지의 호응을 얻어 전라도와 충청남도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900년에는 정식으로 후백제왕이라고 말하면서 관직도 만들고 국가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당시 분열 중이었던 중국 대륙 남쪽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고 일본과도 외교적 관계를 맺어갔습니다. 901년에는 대야성(합천)을 공격하고 이후 신라의 여러 성들을 빼앗았는데요. 927년에 신라의 수도인 금성까지 쳐들와 당시 왕이었던 경애왕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해 갑니다.


이건 한국사통론의 내용인데요, 삼국사기의 내용과는 좀 다릅니다. 삼국사기에는 견훤이 진성여왕 6년인 892년에 완산주(전주)에서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무진주(광주)에서 완산주(전주)로 나중에 옮겼다고 보는 쪽이 더 타당해 보인다고 하네요.  ^^;;;



한편 궁예는 신라의 왕자 출신이었습니다. 궁예는 일찍이 중이 되었습니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던 때 양길의 부하가 되었는데요. 후에 양길을 무너뜨리고 송악(개성)을 근거지로해서 901년에 후고려를 건국하게 됩니다.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의미라고 보면 됩니다. ^^;;


904년에 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로 정하면서 정부조직을 마련합니다. 905년에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연호를 성책으로 고쳤지요. 그러더니 911년에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고 연호를 수덕만세로 바꿉니다. ㅡㅡ;; 궁예도 견훤처럼 중국대륙의 국가들에게 사신을 보내면서 친선관계를 다졌지요. 그러면서 신라도 공격하고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를 비롯한 전라남도 서남해안의 수십 군현을 점령하는 등의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후삼국이 성장하는 동안 신라는 금성 부근의 경상도 일대만 지배할 뿐이 세력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그 사이 918년 궁예의 태봉은 왕건에 의해 고려로 교체되었습니다. 927년에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운 후 돌아가는 사건이 벌어지자 왕건은 사신을 신라로 보내 신라왕을 위로하고 후백제에 군대를 보내 공산(대구 동북쪽)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신라와 고려 사이의 유대가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지요.


국 935년인 경순왕 9년에 신라는 군신회의를 통해 고려에게 복속하게 되었고, 936년 후백제마저 고려에 병합되어 후삼국 시대는 끝이 나게 됩니다.




이상이 신라가 멸망한 이야기에 대한 요약입니다. ^^;;


참고로 한 책은


2010년 검정을 통과한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10년 검정을 통과한 비상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02년 제작된 고등학교 국사

1996년 제작된 한국사통론 4판

2004년 제작된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이렇게 입니다.


다음은 고려 이야기의 시작인데... 좀 책을 뒤져보고 어떻게 요약(?)해 쓸지 고민을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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