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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15.고려의 무신정권과 외세에 대항한 이야기(ver 0.1) 본문
앞선 글을 통해서 고려가 어떻게 나라의 기틀을 잡았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고려 사회의 모습과 고려란 나라의 구조를 두 편으로 살펴봤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던 것은 신라를 망하게 한 지방의 세력가들인 호족을 어떻게 고려가 고려란 나라의 왕의 말을 잘 듣도록 하느냐였습니다. 그래서 고려는 중앙집권화를 하지요. 중앙집권화는 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을 말하죠. 그래서 호족들이 버티고 있는 각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는 것은 중앙집권화를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일이지요.
이렇게 하기위해 처음에 왕건은 호족들의 딸들과 결혼을 하는 혼인 정책을 펼치지요. 그리고 이후 후대 왕들이 당나라의 조직체계를 받아들이면서 호족을 중앙 관료로 만드는 작업을 합니다. 물론 중간에 피비린내 나는 숙청도 있었구요.
그런데 이러는 과정에서 한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방 호족을 중앙의 관료로 흡수해서 고려 정부의 힘이 커지는 것까진 괜찮았는데 이 중앙의 관료들이 하나의 집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방에 있는 호족들이 중앙 관료가 되도록 이런 저런 혜택을 주다보니 중앙 관료가 하나의 귀족 집단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귀족집단이 되었다는 것은 다른 계층 혹은 집단들이 쉽게 이들 무리에 낄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뜻도 됩니다. 마치 요즘 한국의 재벌가가 그들끼리 사돈 맺으며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말이지요. ㅡㅡ;;
이들 중앙 관료들에게 출세하기 위해서는 유교가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적으로 학문을 잘하는 사람들을 높이쳐주게 되죠. 상대적으로 군인들이 소외되고 천하게 여겨지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집단을 그래서 보통 문벌귀족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반기를 든 것은 천시되던 군인집단인 무신들이었습니다. 불만이 쌓이고 쌓였던 것이 폭발한 것이었지요. 이번에는 이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또한 무신들에게 북방민족들의 침입이 꽤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마지막에 무신정권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아가면서 끝까지 저항하고자 했습니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그 과정에서 문제가 많다면, 그 문제들이 발목을 잡기 마련이지요. 그러다보니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북방민족들에 대한 저항도 같이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고려와 북방민족들간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서론이 좀 길었는데요. 일단 고려와 북방민족간의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죠.
태조 왕건 시절에 북방 민족인 거란이 사신을 보냅니다. 942년은 태조 왕건이 왕이 된지 24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거란은 사신을 통해 고려와 친하게 지내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낙타 50마리를 보내지요. 그런데 낙타 50마리는 굶어죽이고, 사신은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이러면서 태조 왕건은 "거란은 발해와 옛 동맹을 저버리고 하루 아침에 공멸한 무도의 나라이므로 교빙할 수 없다"고 했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발해와 친하게 지내던 거란이 힘이 강성해지자 발해를 멸망시켜 버린 것 때문에 거란과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발해의 멸망은 내분 탓도 있었겠지만요. 여하튼 결정적으로 발해를 멸망시킨 것이 거란족이었으니 고려가 차갑게 대하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북방으로 영토를 넓힐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발해에서 건너온 고구려 출신 유민들 때문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후대 왕인 정종(923~949)은 북방 개척을 위해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려고하고 광군사란 조직을 설치하고 30만의 군대를 정비했습니다. 정종부터 광종(949~975) 때까지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 사이에 여러 군사 주둔을 위한 진을 쌓아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합다. 한편 고려로 넘어오지 않은 발해 유민들은 압록강 중류지역에 모여서 정안국이란 나라를 만들기도 합니다. 정안국은 발해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기 때문에 고려보다도 더 거란과 친해질 수가 없었지요. 정안국은 고려와 송나라와 교류하지만 거란과은 적대시 합니다. 그러면서 고려와 거란 사이의 완충적인 역할을 하게 되죠.
중국대륙을 위협할 정도로 거대했던 거란족이 자신들을 상대로 적대하는 고려와 정안국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았겠지요. 고려가 군사를 일으켜 치러온다면 꽤 골치 아플테구요. 그래서 거란은 일단 986년에 정안국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991년, 압록강 주변에 있던 여진족들을 시켜서 래원성을 쌓으면서 대대적인 침입을 준비하게 됩니다.
거란이 전쟁 준비를 마치고 침입한 것은 2년 뒤인 993년인 성종 12년이었습니다. 동경유수의 소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고려의 서북쪽 변방에 쳐들어오죠. 이 때 고려에서는 서희가 출정해 소손녕과 외교적인 협정을 통해 담판을 짓는데요. 이 덕분에 압록강 동쪽의 땅을 거란에게 보장 받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었지요. 고려가 중국대륙을 통일한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어야 했습니다. 거란이 이런 조건을 내걸었던 것은 굳이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지 않는 이상 전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고려는 이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점령하고 여러 성을 쌓고 북방 강화에 힘을 쏟게 됩니다.
하지만 북방의 경계를 강화하는 고려의 행동에 거란은 불편해집니다. 서을 쌓는 다는 것은 여전히 적대적이라는 표시이기도 하니까요. 거란은 협약으로 고려에게 넘겨준 강동 6주를 자신들에게 다시 넘길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고려가 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겠지요.
결국 1010년인 현종 1년. 거란의 성종은 고려의 왕이 합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바뀌었으니 바로 잡겠다며,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게 됩니다. 고려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서북면도순검사 강조가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불륜관계며, 김치양이 군사를 일으켜 왕위까지 넘보고 있다는 명분으로 목종까지 제거하고 현종을 왕으로 추대했거든요. 어찌 생각하면 쓸데없는 이유지요.
고려의 양규는 흥화진에서 거란군을 상대로 열심히 싸워 버텼습니다. 그렇지만 앞서 현종을 왕으로 세운 강조가 통주에서 패해 포로가 되었고, 개경까지 함락이 되어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을 떠날 정도로 위태로웠지요. 거란은 강조를 잡았다는 나름 명분을 세웠죠. 그리고 거란이 개경까지 쳐들어갔지만 후방쪽인 흥화진과 북계지방의 군사들이 항복하지 않아 위험 요소가 있었기에 이외의 소득없이 물러났습니다. 그러면서 사신을 보내며 친하게 지내자는 조건을 걸지요.
하지만 고려는 거란과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현종이 거란에 방문해 이 사정을 설명하라는 식으로 입조하기를 요구합니다. 적진에 왕이 오라는 요구지요. 현종은 병이 있다는 핑계로 계속 거부합니다. 거란은 이후 강동 6주를 반환을 또 요구하게 됩니다. 고려는 당연히(?) 거절당했지요. 이에 거란은 1018년 소배압을 10만 대군과 같이 보내 3차 침입을 감행합니다. 이번엔 상원수 강감찬이 홍화진에서 거란군을 크게 무찌릅니다. 게다가 퇴각하는 적군을 귀주에서 한번 더 섬멸해버리죠. 결국 거란은 1019년에 침입을 포기하고 화약을 체결하고 평화관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이 관계를 마무리 짓게됩니다.
이후 수도 개경을 함락 당했던 고려는 강감찬의 건의로 개경에 나성(외성)을 축조하게 됩니다. 이 공사는 1029년인 현종 20년에 완성이 되구요. 1033년부터는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완공 된 장성을 천리장성이라고 합니다.
한편, 거란이 이렇게 정리된 이후 말갈족의 후예인 여진족이 자신만의 세력을 키우게 됩니다. 11세기 후엽에 북만주의 왕안부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게 되지요. 강력해진 군사력으로 1104년인 숙종 9년에 고려에 흡수된 여진족들을 토벌하기 위해 함흥에 주둔하고 정안관(정평)까지 쳐들어오는데요. 고려에선 임한과 윤관을 보내 막아보려고 했지만 여진의 기병에게 고려의 보병이 상대가 안될 정도로 당하고 돌아옵니다. 이에 윤관의 건의로 기병을 주축으로 한 별무반이 조직되는데요. 신기군이라는 기병과 신보군이라는 보병, 승마군이라고 불리는 승병으로 편성됩니다.
그러더니 1107년인 예종 2년에 윤관은 새로 정비된 부대를 이끌고 여진정벌을 하러 갑니다. 17만의 군사를 이끌고 정주관을 시작으로 여진족이 머무르던 함흥까지 점령하게 되죠. 그리고 그 지역에 9성을 쌓아 북방 경계를 강화하게 됩니다. 이에 여진족은 끊임없이 이 지역을 침략하고 사신을 보내면서 이 지역을 돌려달라고 요구합니다. 문제는 고려 내부에 윤관을 시기하는 세력들이었는데요. 이 세력들이 고려가 여진에게 9성을 돌려주도록 만듭니다. ㅡㅡ;;;
이후 1115년 여진족은 더 강해져 금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만들게 됩니다. 거기다가 스스로 황제라고 말하지요. 이 황제라는 단어는 동아시아의 최고 강자임을 자처하고 싶을 때 쓴다고 예전에 말했었지요. 금나라가 당시에 두려울 것이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1126년에는 금나라는 거란족의 나라였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고려에게 사대의 예를 요구합니다. 사대의 예란 황제에게 주기적으로 사신을 보내 인사를 오라는 뜻입니다. 실질적으로는 싸우지 주기적인 조공을 바치면 굳이 싸우지 않겠다는 의미지요. 이에 당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던 이자겸이 중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스스로 신하를 칭하자고 밀어 붙여 결국 고려는 금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앞서 살펴본 고려와 북방민족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요약입니다. 한편 고려는 중국 대륙이 분열되어 있던 시기부터 외교적 친선관계를 유지했는데요. 송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 한 후에도 친하게 지내게 됩니다. 다만 앞서 말한 서희와 거란족과의 담판에 의해서 잠시 공식적인 교류가 끊기기도 했었지만 기본적으로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잠시 중국대륙의 상황을 살펴보죠. 979년에 중국 대륙이 마침내 송이란 이름의 나라로 사실상 통일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북쪽에 요라는 거란족의 나라가 거대한 세력을 유지한 상황이었죠. 이 거란의 나라인 요나라가 송나라 뿐만 아니라 고려도 괴롭히죠. 그래서 어찌어찌 정리를 하지만 문제는 그 뒤에 여진족이 금이란 나라로 정리가 되면서 북방의 거대 세력이 교체가 되었을 뿐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 금나라가 점차 강대해지더니 송나라를 1126년에 중국 대륙 남쪽으로 밀어내 버립니다. 송나라는 졸지에 수도를 빼앗기게 되었죠. 그래서 이 때부터 송나라가 있던 시기를 남송시대라고 부릅니다.
다시 고려의 이야기로 돌아오죠. 이번 이야기의 중심인 무신들이 들고 일어난 결정적인 이유는 앞선 수 많은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는 공에도 불구하고 무신들이 지속적으로 천시되고 무시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신들이 북방민족들의 침입을 막아낸 공으로 어느 정도 지위를 찾을 수 있었지만 턱없이 부족했지요. 그래서 예종(1105~1122) 때 는 이런 무신들을 위해 국학에 7재를 설치하면서 무학재를 넣게 됩니다. 문무양학 모두를 성장시키려는 노력이었지요.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다음 왕인 인종(1122~1146) 때는 각 지방의 주현에 향학을 세워 지방교육을 강화했고, 김부식에게 명해 우리나라 역사를 정리한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등의 일을 벌입니다. 그리고 1131년에는 동서대비원과 제위보를 갱신해 어려운 백성을 구제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고려 내부적인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중앙관리들의 다툼인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일어났고, 뿐만 아니라 과중한 토목공사를 강행되어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집니다. 특히 이자겸의 난으로 불타버린 만월대를 재건했고 태안에 굴포 운하를 만들다가 중단한 일은 토목공사 중에 가장 고된 일들이었지요.
고려를 뒤흔든 이자겸의 난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도록 하죠. 이자겸은 고려 전기의 최고 문벌귀족인 인주 이씨가문의 사람입니다. 이자겸은 예종(1105~1122)의 장인이자 태자의 외할아버지로써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요. 태자였던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 힘을 제대로 발휘 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일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 왕보를 왕위찬탈하려는 명목으로 제거하죠. 왕위찬탈이라는 명목이 제시될 때는 대상자 한 명이 아니라 그를 도우려 했던 신하들까지 제거되기 마련입니다. 이때 지방 출신의 신진관료 세력인 한안인, 문공미, 이영 등이 처형됩니다. 본격적인 중앙관료들의 힘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더니 이자겸은 외손자인 인종에게 인종의 이모들인 이자겸의 딸 두명을 시집 보냅니다. ㅡㅡ;; 이 정도로 힘이 막강해진 것이죠. 아무리 근친관계가 허용되는 시기였다고 하더라도 이모들을 조카에게 시집을 보낼 수 있을 정도 막장짓을 할 정도였으니 뭐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이러니 이자겸은 왕인 인종을 몰아내고 직접 왕위에 오르려는 욕심을 부리지요.
직접 왕이 되려는 이자겸 때문에 1126년인 인종 4년에 김찬과 안보린 등의 국왕의 측근세력들인 또 다른 신진관료들이 이자겸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자겸 일파인 척준경이 군사를 몰고와 막아내죠. 하지만 이자겸은 이런 반대파인 신진관료들에 의해서 제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같은 편이었던 척준경과 불화가 생겨 척준경에 의해서 제거 됩니다. 당혹스럽지만 고려 전기 최고의 가문이었던 인주 이씨가 이렇게 몰락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인주 이씨의 몰락이 아니라 권세를 누렸던 세력가문의 몰락이 아니라 문벌귀족 사회의 붕괴의 신호탄이 됩니다.
앞서 북방민족의 친입 이야기를 요약하면서 1126년인 인종 4년 당시 최고 권력가인 이자겸이 금에 대한 사대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행동이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려는 모쳥과 백수한, 정지상 등이 세력을 규합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금에게 사대하게 된 이 상황은 개경에 있던 땅의 덕이 모두 끝난 탓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서경으로 천도하자고 주장하죠. 이건 고려 사회를 풍미했던 풍수지리설에 근거한 주장이었는데요. 실질적으로는 이를 이용해서 기존 문벌귀족정치를 벗어나 자주적인 정치를 해보자는 의도였습니다. 왕으로써의 힘이 많이 약했던 인종은 이들의 행위와 말에 동조하게 되죠.
하지만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파 문벌귀족들은 미신으로 현혹시키지 말라며 강력하게 이들을 압박합니다. 개경파들의 거센 반발에 서경으로의 천도는 무산됩니다. 이에 포기하지 않고 묘청일파는 1135년인 인종 12년에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지요. 나라 이름을 대위라고 하고 연호를 천개라고 지어놓고 1년간 유지했지만 김부식이 이끈 관군에게 토벌 당하고 맙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고려귀족 사회에 대한 불만이 응집되어 폭발된 신호였습니다. 간신히 이 두 난이 수습이 되긴 했지만 점차 귀족사회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고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앞서서 고려사회 모습을 살펴보면서 조금씩 무신에 대해 문신들이 무시하는 정책을 봤었는데요. 대표적인 문제가 같은 등급의 관리인데도 무신은 월급을 문신보다 적게 받았던 전시과 문제가 있었지요. 뿐만 아니라 관료로써의 진급에서도 차별을 받았다고 하네요.
고려는 기본적으로 관리를 양반제도를 두어서 관리했습니다, 한쪽이 행정관료인 문반이고 다른 한쪽은 군인인 무반입니다. 이들이 법적으로는 동등한데 실제적으로는 무반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군인의 고유 권한이라 할 수 있는 군대 지휘 통솔권까지 문반이 장악을 할 정도였지요. 게다가 일반 농민층으로 충당되는 군인들에게 지급되는 땅을 문벌귀족들이 빼앗아가는 일도 흔했다고 합니다. 당시 무신의 이미지는 문신인 귀족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만 무신들이 거란족과 여진족 등과의 전쟁에 대한 공 덕분으로 지위를 유지 또는 조금씩 상승시켰을 뿐이었지요.
오래된 관습처럼 쌓여있던 무신들의 분노가 1170년인 의종 24년에 드디어 폭발하게됩니다. 의종이 문신들과 함께 보현원에 놀라갔을 때 호위했던 무신인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지요. 그래서 의종과 같이 있던 문신들을 살해하고 의종을 폐위 시켜버리는 일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무신들은 의종인 동생인 명종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요 정부 요직을 자신들이 차지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군 관료들의 회의 기관인 중방이 정치를 이야기 하는 주요기관이 됩니다.
무신이 일으킨 쿠데타로 정중부가 정권을 잡은 정권은 매우 불안했습니다. 1173년 동북면방마사 김보당이 의종의 복위를 위해 거병을 했다가 실패하고,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서북면지방민들의 불만을 이용해 정중부정권의 타도를 외치며 서경에서 난을 일으키지만 진압됩니다. 1175년 귀법사의 승려 2000여명도 반란을 일으켰는데요. 승려들이 왜 반란을 일으켰냐면, 그동안 교종계열에게 지원했던 것이 문벌귀족 가문들이고 왕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진압이 되죠. 이 때문에 최씨정권은 교종을 탄압하고 선종을 후원하면서 선종을 성장시킵니다.
게다가 노비들도 들고 일어났습니다. 과거 문벌귀족들을 위한 것은 아니고 자신들의 삶이 어려웠기 때문인데요. 대표적으로 1176년 명종 6년에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와 망소이가 난을 일으킵니다. 이들 세력은 한때 공주를 점령하고 관군을 무찔러냈을 정도로 강했지요. 하지만 관군의 회유에 넘어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1198년 신종 1년에 천민과 노비들이 봉기를 하는데요. 사노비였던 만적이 북산에 공노비와 사노비를 모아놓고 누구나 평등하다고 외치면서 대규모 반란을 도모했습니다만 중도에 발각되어 실패로 끝나고 말지요.
한편 무인세력 안에서도 내분이 일어납니다. 1171년 같이 무신정변을 일으킨 이의방이 이고를 죽입니다. 그러더니 1174년에는 정중부가 이의방을 제거하고 단독 정권을 수립하죠. 1179년에 장군 경대승에게 정중부가 죽임을 당하고, 1183년에 경대승이 집권한지 13년째 되던해에 병으로 죽게 됩니다. 이 기회를 틈타 이의민이 정권을 접수하지만 1196년인 명종 26년에 최충헌에 의해 숙청당하면서 최씨가문이 고려를 장악하게 됩니다. 이후 최충헌은 무신정권을 안정시키면서 자신의 자손들까지 4대에 걸친 62년간 고려를 이끌게 됩니다.
최충헌을 비롯한 무신정권기에 정부가 존재는 했지만 무신정권은 독자적인 지배기구가 등장해 정부기구는 형식적으로만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군 관료들의 회의기관이었던 중방이 그 지배기구 역할을 했지요. 이때까지만 해도 중방은 모든 무신들의 연합정권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최씨 정권기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최충헌이 교정도감이란 기구를 설치해 모든 국가적인 일을 처리했는데요. 때문에 교정도감의 장인 교정별감이 권력의 핵심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오다가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정방이란 기구를 자기집에 설치해 인사문제를 독립시키게 되고, 문인들의 조언을 얻기 위해 서방을 두기도 했습니다.
무신정권 초반 군사력은 정부의 정규군을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점점 개인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사병들을 모으게 되는되요. 경대승이 집권할 당시에는 100여명의 결사대를 두었다고 합니다. 이 군사들이 그대로 최씨 정권에게 계승되었고, 점점 그 숫자가 늘었다고 합니다.
자체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군사가 늘어나자 무신들의 옹호 및 동의가 점점 필요없어지게 되지요. 그래서 오히려 최씨 정권은 그동안 무신들의 회의기관이며 나라의 중대사를 이야기 하던 중방을 억압하고 문신들을 자신의 세력권 안에서 보호하게 됩니다. 국가를 운영하는 것에 있어서 위협이 상대적으로 적은 문인들이 다루기도 편하고 이들의 행정능력도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동국이상국집을 지은 이규보도 등용된 것입니다.
무신정권의 또 다른 군사 기반인 삼별초는 최우가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위해 야별초를 둔데서 비롯됩니다. 지금으로 치면 경찰조직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수가 늘어나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는데, 몽골군과 전쟁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 온 자들로 신의군을
편성해 합치면서 삼별초가 완성된 것입니다.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두터운 총애를 받아 그 수족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이들은 국가에서 지출되는 녹봉을 받으면서 군대와 경찰 등의 공적인 임무를 띄었기에 순수 사병집단과는 달랐다고 합니다 하자만 실제로는 무인정권의 사병 노릇을 할 수 밖에 없고 또 그랬다고 합니다.
고려에서 무신정권이 완성되어가던 시기인 13세기 초에 몽골에선 테무진이 여러 몽골부족을 통일합니다. 1206년에 테무진이 칸의 지위에 오르면서 칭기즈 칸이 되지요. 이런 몽골과 처음 고려가 접촉한 것은 1219년인 고종 6년 입니다. 이유는 앞서 살펴 본 북방민족 중 하나인 거란족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지요. 이 거란족의 요나라가 멸망한 후 여진족의 금나라 밑에 있었는데요. 금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독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금을 약하게 만든 몽골족에게 밀려 고려 땅까지 밀려오게 된 것이지요. 고려에서도 이들이 밀려오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순 없어서 공격하다보니 거란족이 강동성에 몰려서 같히게 된 것입니다. 이 거란족 잔당을 몽골과 고려가 같이 협공해 패멸시킨 것이지요.
그런데 몽골이 거란을 토벌 한 후에 고려에게 과한 공물을 요구합니다. 특히 1221년인 고종 8년에 파견된 몽골 관리 제구유는 몽골 황태자의 지시라면서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죠. 게다가 태도도 오만불손해 고려의 군신들의 분노가 높아집니다. 그러다 1225년에 제구유가 몽골로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부근에서 누군가에 의해 살해를 당합니다. 몽골은 이를 구실로 고려에 침입하게 됩니다.
1231년인 고종 18년에 몽골의 1차 침입이 시작되었습니다. 몽골의 장군 살리타가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쪽 지방인 북계의 여러 성을 함락시킵니다. 거기에다가 개경을 포위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몽골군을 맞아 박서가 귀주에서 항전했지만 수도가 포위되자 어쩔수없이 화의를 청할 수 밖에 없게 되죠. 그러면서 몽골은 고려의 서북면에 다루가치를 설치하고 철수하게 됩니다. 다루가치는 몽골의 지역관리 관청입니다.
이후 몽골은 더욱 더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파견되는 몽골의 관리들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게 되지요. 이에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는 몽골에 대항할 것을 결의하고 1232년인 고종 19년에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몽골을 향해 항전하게 됩니다.
이러자 몽골은 2차 침입을 단행합니다. 이번에는 개경을 넘어 한강 남쪽까지 공격하지요. 하지만 몽골장수 살리타가 처인성(용인)에서 김윤후에게 사살되어 철수하게 됩니다. 이후 1259년 고종 46년에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수 차례 몽골은 침입 하게 됩니다. 항전 방식은 최씨정권이 바다 건너 강화도에서 항전을 지휘하고 육지에서는 민중들이 침략군에 대항해 싸우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258년 고종 45년에 최의가 문신 유경과 무신 김인준(후에 김준으로 개명함) 등에 의해 제거 됩니다. 이렇게 상황이 변하자 강화파 문신들은 몽골과 화의를 주장하고 1259년 화의가 성립된 것입니다. 화의란 친하게 지내자는 말이지만 사실상 항복을 의미합니다.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무신 김준은 문신 유경을 제거하고 스스로 교정별감이 되어 무신정치를 유지하고 몽골과의 강화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이후 1268년 임연은 김준을 살해하고 교정별감이 되죠. 정권지도자가 자주 바뀌었다는 것은 최씨 정권이 끝나면서 무신정권의 권위가 많이 약해졌다는 증거기도 하죠. 여하튼 임연은 몽골에 대한 반대가 노골적으로 합니다. 임연은 친몽정책을 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왕창을 세웠지만 몽골의 압력으로 다시 원종을 복귀 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임연이 죽고 그의 아들 임유무도 반몽정책을 고수하지만 1270년 원종 11년에 원종이 몽골세력을 등에 업고 몽골에서 귀국하면서 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명합니다.
임유무가 이를 거부하고 재항쟁을 결의하지만 반대파에 의해 피살되면서 무신정권이 종식되면서 어떻게든 이어오던 몽골을 향한 항쟁도 끝나게 됩니다. 이후 고려는 왕정을 복구하고 수도를 강화도에서 다시 개경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도 무신정권의 무력기반 중에 하나였던 삼별초가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배중손은 강화도에서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옹립합니다. 그리고 장기전을 위해 진도로 내려가 남부지방 일대를 지배했지만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토벌로 1271년 함락됩니다. 이후 남아 있던 일부가 김통정의 지휘로 제주도로 옮겨가 항쟁을 이었지만 1273년인 원종 14년에 진압되면서 몽골을 상대로 하던 항쟁은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이상은 고려 무신정권과 북방민족을 막아낸 항쟁에 대한 요약글이었습니다.
참고로 한 책은
2010년 검정을 통과한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10년 검정을 통과한 비상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02년 제작된 고등학교 국사
1996년 제작된 한국사통론 4판
2004년 제작된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이렇게 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정리(?)하는데 좀 오래 걸렸습니다. ㅜㅜ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름 빼고 넣을 것을 정하다보니 단순한 요약을 넘어서게 되네요. 이번글에서 서론이 길어진 이유기도 하구요. 다음은 원 간섭기와 고려의 멸망 이야기를 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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