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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는 필요한 것일까? 본문

문화 컨텐츠 연구

사형제도는 필요한 것일까?

무량수won 2011. 3. 25. 02:11


요즘 드라마를 하나 보고 있다. 뭐 매일 보는 드라마인데 새삼스래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표현하느냐고 말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여하튼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미국 드라마이고, 수사물이다.

본즈(bones)라는 드라마인데, 죽은 사람의 뼈를 가지고 수사를 해결하는 법의학 드라마다. 이야기의 핵심이 드라마는 아니니 드라마 소개는 한줄로 하도록 하고, 이 드라마에서 사형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첫번째 시즌의 일곱번째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사형수가 한명 있다. 이 사형수의 결백을 믿는 변호사가 나타난다. 이 변호사가 사형수가 무죄일 수도 있는 증거를 가지고 드라마의 주인공의 무리에 찾아온다. 사형수는 약 30시간 뒤면 집행이 되어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 정의로 똘똘 뭉친 주인공 무리들은 이 사형수가 무죄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 저런 증거를 찾아내고 사형을 연기하려고 한다.

그렇게 30시간동안 힘들게 증거를 찾아내고 있는데, 사형수에게 죽었을 것이라 여겨지는 피해자들의 시체가 발견된다. 사형 집행이 30분 정도 남은 시간. 주인공 무리가 이 시체를 보고 하면, 사형수는 재수사를 위해서 사형 집행이 멈춰진다. 그들이 찾아다닌 증거들이 시체와 함께 사형수가 범인임을 다시 한 번 가리키고 있었다. 주인공 무리는 순간 갈등에 휩싸인다.

결국 주인공 무리는 시체를 발견했음을 보고하게 되고, 사형수는 집행이 미뤄지게 되었다. 거기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 사형수는 이 주인공 무리들에게 자신이 의도했음을 뻔뻔하게 밝히고 자신을 살려줘서 고맙다고 주인공 무리를 놀린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무리들은 사형제도에 찬성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이들에게 사형수의 형 집행을 막아달라 부탁하러온 변호사는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아이러니 하게도 혹은 모순되게도 변호사는 믿고 있던 사형수에게 발등을 찍혔고, 사형을 찬성하던 주인공 무리들은 사형수를 사형 집행이 되지 못하도록 막아선 꼴이 되었다.

참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 자료출처 : 위키백과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사형제도에 대해서 찬반 의견이 엇갈리던 일들이 스쳐지나갔고, 당시에 그리고 지금의 내 입장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사형제도에 대해서 구글에서 검색하다가 이런 글을 보았다.

그럼에도, 사형제도에 반대한다. - 하라님의 글

꽤 잘 정리되어 있으니 참고 해주기 바란다. 더불어 댓글에는 교도관으로 군복무를 한듯한 이의 사형제도 찬성론에 대한 것도 있다.



나는 사형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아무리 악질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그 목숨을 사람들이 강제로 가져갈 수는 없다고 본다. 설사 법을 악용해서 악한 짓을 저지르더라도 사형은 아니라고 본다.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라는 식의 굉장히 흔히 말하는 휴머니즘(humanism) 덩어리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만에 하나 때문이다. 물론 그 만에 하나라는 것 때문에 효율적인 어쩌면 획기적일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우스워보일지 몰라도, 그 만에 하나가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만에 하나라도 살펴보고 조심해야 한다고 본다. 즉, 사형제도를 통해서 만에 하나 억울한 죽음을 겪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고 본다.



사형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때 그리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가장 많이 되는 때는 흉악범이 잡혔을 때다. 이런 흉악범에 대해서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 속에는 어떤 동정도 줄 필요가 없다는 태도로 비난을 한다. 더불어 피해자가 자신과 관련된 사람이라고 할때 당신은 끝까지 사형을 반대하겠느냐고 윽박 지르기도한다.

모르긴 해도 내 주변 사람이 누군가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다면, 그들처럼 그 누군가를 죽이려 하거나 혹은 사형 시켜야 한다고 울부짓을지 모르겠다. 거의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을 죽인들 내 곁을 떠나간 사람이 내 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일까? 그 사람을 죽인 다고 내 속은 시원해 지는 것일까? 그 사람이 죽으면 나는 행복해 지는 것일까?

결국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사람을 죽이든 죽이지 않든 내 상태는 똑같을 것이다. 아니 어떤 변화가 있겠지만 그 사람이 죽은 것과 상관 없이 내 곁을 떠난 사람에 대한 슬픔만이 더 큰 멍울로 남아있을 것이다.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가 아니다. 만약 그들의 마음속의 원한이 깨끗이 해결이 되고 행복해 진다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그들을 죽여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져서 슬픈 것이지 살인자가 살아있어서 슬픈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사형제도라는 것을 악용하게 되면 위에 링크시켜놓은 블로그에 써진 글에 표현되는 것 처럼 어느 것 하나도 되돌릴 수 없는 마지막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무기징역으로 살아 있어도 지나간 세월은 보상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당사자에게 어떤 것이라도 해줄 수가 있다. 그러나 죽은 사람에게는 무엇을 해줄수 있을까? 벌초를 해줘야 할까? 아니면 융성하게 제사를 지내줘야 할까?



사형제도가 없어서 혹은 시행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더 많이 법을 어기고 흉악한 일을 저지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건 사형제도 때문이 아니다. 사형제도가 있건 없건 잘못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고, 또 존재 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을 제대로 가둬두지 못해서 혹은 그들을 법으로 잡기가 어렵다면, 그건 법의 잘못이지 사형제도의 유무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형제도에 대해서 떠올리면서, 요즘 화제가 되는 이야기들이 모두 겹쳐지고 있다. 일본은 나쁘니까 도와주지 말아야 한다. 혹은 일본은 기독교를 믿지 않으니까 못된 나라다. 당신은 우파를 지지하니까 잘못된 것이다. 당신은 좌파를 지지 하니까 잘못된 것이다. 등등...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 누군가를 깍아 내리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 누군가를 미워하다보니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사형제도를 관철시키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닐까?

분명 사형제도는 내가 같이 떠올린 사람들보다는 좀 더 복잡한 논리에 의해서 결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니까 지지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형제도가 사회의 이득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마지막 질문의 답이 되어줄 수 있을까?



사형제도... 그것이 모든 원한의 해결책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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