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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5.고조선 멸망 전후의 초기 국가들(ver 0.1) 본문

역사/역사잡담

한국사 5.고조선 멸망 전후의 초기 국가들(ver 0.1)

무량수won 2014. 7. 30. 10:56

고조선이 점차 국력이 떨어져가던 시기에 각지에서 국가가 들어서게 됩니다. 삼국시대라 부르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말하는 국가에 비하면 국가라고 부르기엔 많이 모자라긴 하지만요.


단순한 족장들의 모임에서 여러 족장들을 대표하는 군장이 나타나고 하나의 나라의 모습을 처음 갖춘 것이 고조선입니다. 이후 비슷한 모습으로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 삼한에서 국가의 모습이 갖춰집니다.



국가의 발전 단계


정확한 분류는 될 수 없지만 간략하게 나눠보자면, 여러 족장들 중 대표 군장이 존재하는 나라를 보통 군장국가라고 부릅니다. 이 군장국가들의 특징은 군장 밑의 각 부족의 족장들의 힘이 너무 세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군장국가 보다 군장사회로 부르는데요. 일단 여기서는 군장국가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


그러다 족장들과 군장들이 모여 좀 더 힘 있는 대표가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왕이지요. 사실상 군장국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수도 있지만, 왕은 군장보다 좀 더 강력한 권한을 지니게 됩니다. 나름 공통의 규칙을 통해 군장과 족장들 간에 구속력을 만드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를 초기국가라고 부릅니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고대 국가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는데요. 엄청나게 강한 왕권으로 중앙집권화를 이루는 단계를 고대국가라고 합니다. 신하들이 왕의 말에 꼼짝 못하는 그런 왕 말이지요. TV에서 종종 보던 그런 권위있는 왕을 상상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


군장국가 → 초기국가 → 고대국가


여기서 다루게 될 단계는 군장국가와 초기국가 입니다.



부여부터 살펴보도록 하죠. 부여를 초기국가 단계에 집입한 두 번째 국가라고 보고 있습니다. 처음은 고조선이구요. 만주의 송화강 유역 평야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하는 부여는 중국 고서인 사기에서 기원 전 4세기쯤에도 존재 했다고 나타납니다. 사기에 묘사 된 부여의 모습은 군장국가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이 부여가 초기국가 단계에 들어선 것은 기원 전 2~1세기 사이 쯤으로 추정 됩니다.


부여왕 밑에는 가축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원래 군장 출신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 가(加)는 각자가 행정구역인 사출도(4개의 지역) 다스렸다고 합니다. 가(加)들이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바탕이 되어주는 것이죠.



부여는 꽤 강력한 국가였는데요. 후한서 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 후 49년에 부여왕이 후한에 사신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에 후한의 광무제가 친하게 지내자면서 매년 사신을 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앞서 고조선 이야기를 하면서 중국의 주나라 왕이 고조선 왕을 제후 취급을 하고 왕이라고 스스로 말한다고 군사를 보내려했다고 했었는데요. 사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 이름을 신으로 바꾸고 왕이 된 왕망이 부여와 고구려를 왕이 아닌 후(候)라고 강제로 부르게 했다고 한 점에서도 확인 할 수 있죠.


신 이후에 들어선 후한의 광무제와 부여왕이 자신을 왕이라면서 사신을 주고 받았다는 것은 그 만큼 대등한 위치라고 대우해주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또 그만큼 후한에서 쳐들어와도 막아낼 자신있다는 뜻도 되지요. 오히려 기원 후 111년에는 부여왕이 보병과 기병 약 7~8천을 보내 낙랑군을 공략할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잘나가던 부여도 기원후 3세기가 되면 북쪽의 선비족과 고구려의 압박 의해서 위태로워 집니다. 선비족의 모용외와 모용황의 침략을 당해 큰 피해를 입습니다. 이에 휘청거리던 부여는 고구려에게 기대 연명하다가 494년 고구려에게 항복함으로써 멸망하게 됩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타난 부여의 사회 모습도 간단하게 살펴보고 가도록하죠. 부여법에 의하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족은 노비로 만들어버리구요. 남의 물건을 품쳤을 때는 물건 값의 12배를 물어내야 한다고 합니다. 간음한 자(바람난 사람)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했다고 하네요. 제천행사의 이름은 영고라고 하구요. 전쟁이 일어날때 제천 의식 후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에 대한 점을 쳤다고 합니다.




옥저와 동예도 살펴보도록 하죠. 옥저와 동예는 동해안에 가깝게 위치해 있었습니다. 중국 대륙과의 강력한 국가들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지요. 강력했던 고조선이 무너지고 나서는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는 바람에 지역 사람들이 뭉쳐지기도 힘들었습니다. 왜냐면 한나라가 분리 정책으로 지역 대표자들을 멀리 보내버렸거든요. 그러다 기원 후 1세기쯤 간신히 한 군현이 축출 됩니다.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옥저의 경우는 얼마 가지 않아서 고구려에 편입되고 말아버립니다. 동예는 그나마 옥저보다는 좀 더 버틸 수 있었지만 245년 위나라의 낙랑태수와 대방태수의 공격을 받아 247년 낙랑군에 흡수되고 맙니다. 그러다 고구려가 313년에 낙랑을 무너뜨리면서 동예 지역도 결과적으로 고구려 땅이 됩니다.



교과서에 옥저와 동예의 풍습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정말 할 이야기가 없어서 풍습이야기를 넣는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래도 나름 이유가 있을 테니까 이야기 해야겠지요. 이 이야기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옵니다.


옥저에는 민며느리제 풍습이 있습니다. 여자가 어릴때 남자 집에 데려와서 키우고 성장하면 결혼시키는 제도지요. 또한 가족 공동 묘 관습이 있다고 하네요. 이건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 하였다가 나중에 뼈를 추려 가족 공동무덤인 커다란 목곽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동해안과 가깝다보니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했고, 이런 특산품을 고구려에 공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동예는 족외혼을 엄격히 지켰다고 하네요. 족외혼이란 간단하게 말해 같은 핏줄끼리 결혼 하는 것을 엄격하게 막았다는 것입니다. 족은 부족을 줄여서 말하는 것인데요. 전통적인 부족은 대부분 같은 핏줄이었거든요. 역시 동해에 가까워서 해산물이 풍부했다고 합니다. 동예 역시 특산품이 있었는데요. 고구려와 중국 대륙의 국가에게 단궁(활)과 과하마(조랑말), 반어피(바다표범 가죽) 같은 특산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매년 10월에는 무천이라는 제천행사를 열었습니다. 각 부족의 영역에 민감했던 것으로 보여지 정책이 있는데요. 그건 책화입니다. 만약 다른 부족의 영역에 침범하면 침범한 쪽이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했습니다.




고구려 이야기를 이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동가강유역에 자리를 잡았었습니다. 건국전설에선 기원전 37년 주몽이 부여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이 시기에 세워졌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 지방에 한나라가 설치한 현도군이 기원전 75년에 만주로 쫒겨갔다는 기록 때문입다. 이들을 쫒아낸 세력들이 고구려가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고구려도 군장 국가 형태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1세기 경에 가장 강력했던 계루부에서 대군장이 나왔고, 다른 군장들을 굴복시켜서 초기국가의 형태로 발전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초기국가 형태를 이루었지만 기존의 군장들은 자치권 일부가 인정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이런 것들이 고대 국가의 형태로 변형되면서 사라지게 되는데, 그건 고대국가로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를 이야기 할 때 자세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야는 사실상 군장국가 혹은 연맹왕국 형태로 마지막까지 버텼지만요.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기원후 1세기 후엽입니다. 태조왕이 정복사업을 활발하게 했는데요. 동으로는 옥저를 복속시켰고, 남으로는 청천강까지 내려가서 꽤 넒은 지역을 관리하게 되었답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고구려의 사회는 이렇게 설명됩니다. 큰 죄를 지으면 사형에 처하거나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고 합니다. 또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부인으로 맞이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하구요. 장가를 간 사람은 처가에 일정기간 거주해야 되는 서옥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10월에 추수 감사제는 동맹이라고 불렸다고 하네요.



이제 삼한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고조선이 있을 때는 이 지역에 진 나라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만의 조선이 강력해지면서 중국 대륙과의 교역이 막혔고, 고조선이 무너지고 나서는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면서 정치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그럼에도 진나라는 여러 군장 국가들 사이의 중심세력으로써 대외관계를 주도했다고 합니다.


고조선이 무너지고 그 유이민자들이 대거 남쪽으로 내려왔는데요. 이들이 내려와 철기문화를 보급했고, 그를 바탕으로 각각의 연맹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바로 마한, 진한, 변한인데요. 실제로는 나라의 모습보다는 신지라던지 음차라는 장수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수 많은 작은 군장 국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답니다.


연맹체로 나눠지는 동안에도 진왕이 있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고 종교행사나 전쟁이 벌어졌을 때 통솔자 역할만을 담당했다고 하네요. 이 진왕은 목지국을 다스리는 자가 여러 군장국가들에게 추대되는 형식으로 되었답니다.


목지국 외에도 백제국, 사로국, 구야국등이 삼한지역의 중심세력으로 대두되고 있었답니다. 백제국은 한강유역에 자리잡은 군장국가였는데 나중에 백제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로국은 경주평야에서 성장한 군장국가였는데, 뒤에 신라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낙동강 하류지역인 변한의 강력한 군장국가인 구야국은 가야연맹이 되지만 초기 국가의 형태로 발전은 못하고 신라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이상이 고조선 멸망 전후의 초기 국가들에 대한 정리 및 요약 이야기였습니다.



참고로 한 책은


2010년 검정을 통과한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10년 검정을 통과한 비상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2002년 제작된 고등학교 국사

1996년 제작된 한국사통론 4판


이렇게 입니다.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내용을 하나로 합치려니까 시간이 오래 걸리네요. ㅡㅡ;; 귀찮아서 대충 쓰고 싶은 마음 반, 뭐든 가득 채워보고 싶은 마음 반이 계속 싸우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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