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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베트남은 프랑스의 손안에 떨어져버리고... 본문

역사/베트남의 역사

결국 베트남은 프랑스의 손안에 떨어져버리고...

무량수won 2009. 5. 8. 18:11
응우옌 왕조는 동부 3성과 서부 3성을 코친차이나에게 상실을 하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개혁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하던 사람은 카톨릭을 신봉하는 몇몇의 관리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응우옌 쯔엉 또(1827~1871)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고 자라서 중국 고전에 능했던 그는 프랑스 신부를 알게 되어 1850년대에 그를 따라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지를 견학하게 된다. 이후 고국에 돌아와서는 프랑스어 통역으로 일을 하기도 했던 그는 1871년 사망할 때까지 황제에게 개혁에 관한 상소를 58차례에 걸처 올렸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제시한 개혁은 다음과 같다.
관리의 수를 줄여 봉급을 올려서 부패를 막고, 행정과 사법의 분리를 건의.
외국인 교관을 초청하여 장교들을 훈련시키고, 이들을 통해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도록 건의.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특권층을 과세 대상자에 포함 시키고, 사치품의 비중이 큰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매길 것을 건의.
한자 재신에 쯔놈을 사용하여 일반 농민들이 쉽게 글을 깨우칠 수 있게 하고 신문을 발간하여 보급하도록 하자는 것.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하여 견문을 넓히도록 하는 것등이었다.

보다시피 이러한 건의는 필요한 것이지만 대부분이 기득권 층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에 주변의 지원을 받기엔 어려웠을 것으로 조심히 추측해 본다.

더불어 당시 황제인 뜨 득 은 프랑스가 침략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적극적인 대응 의지가 없었다. 그 원인으로 어릴 때부터 병약하였고, 자신의 이복형을 비롯하여 여러 친인척을 죽인 죄책감에 많이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더불에 북부 지방에서는 잦은 반란이 있었기에, 그는 궁중에서 떠나는 것 조차 두려워하고 있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이 약한 그이기에 프랑스가 침략하기 위해 행동을 취해도 그저 바라만 볼 뿐이라는 것이다.

프랑스는 이런 베트남을 상대로 쉽게 장악해 나갈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장악하려던 목적은 중국 윈난 성과의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함이었다. 영국이 이미 윈난에 진출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함이 있었다. 프랑스는 1866년 부터 2년 동안 메콩 강 탐사대를 결정하여, 윈난 성에 이르는 길을 찾고 있었다. 결론은 메콩 강보다 통킹에서 홍 강을 통하여 윈난에 이르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통킹 델타 지방을 정복하고 홍 강을 지배하에 두려한다.

당시 종주국으로 행세하던 중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태평천국의 난(1850~1864)이 일어나, 베트남에 대한 신경을 쓰기가 어려웠다. 더불어 태평천국의 난의 잔존 세력 일부가 통킹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응우옌 왕조는 이들의 약탈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청나라에게 토벌을 부탁하지만 토벌군들은 베트남 농민에게 오히려 피해를 줌으로 베트남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1871년 유럽에서는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식민지까지 신경을 쓸수가 없었다. 프랑스의 식민 정부인 코친차이나는 본국의 통제가 없어지자 독립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1873년 프랑스의 무역상 장 뒤퓌(Jean Dupuis)는 홍 강을 경유하여 윈난으로 무기와 탄약을 수송하여 장사를 하려 한다. 무기 거래에 대해서 응우옌 왕조는 저지하게 되었고, 뒤퓌는 하노이 일부 지역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코친차이나 정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코친차이나 정부는 이 사건을 발판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고, 홍 강을 개방할 것을 응우옌 왕조에게 요구한다.

응우옌 왕조가 이를 거부하자 1873년 11월 20일 하노이 성을 기습 함락 시킨다. 12월 12일에 통킹 델타의 주요도시를 200여명의 병력으로 점령한다. 그렇지만 12월 21일에 응우옌 왕조를 돕고 있던 통킹 지방에서 활동하던 군벌인 흑기군이 하노이를 위협하여, 통킹 점령 계획은 실패한다.

다소 안정이된 프랑스는 코친차이나에 감찰관을 파견한다. 감찰관은 1874년 1월에 무단으로 점령한 도시에서 프랑스 군대를 철수 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응우옌 왕조와 제 2차 사이공 조약을 채결한다.
기존 6성에 대한 프랑스 주권을 인정받고, 프랑스 국익에 반하는 제3국과의 조약은 채결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더불어 홍 강을 개방하고 꾸이 년, 하이 퐁, 하노이에 프랑스 영사의 주재를 허락하고, 제 1차 사이공 조약에서 규정된 전쟁 배상금을 면제하도록 하였다. 선교사들의 자유로운 왕래도 허락한다.

응우옌 왕조는 외교적으로 해결해보기 위해서 주변 국가의 도움을 청한다. 1876년과 1880년 청나라에 조공사절을 파견하여 원조를 요청하였고, 1868년과 1872년에는 밀사를 홍콩에 보내 영국과 독일의 도움을 얻으려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진 못한다.

1878년에 이르러 프랑스에서는 식민지의 영토를 확장하자고 주장하는 계열에서 권력을 잡게 된다. 1881년 통킹 지방에서는 흑기군 및 중국 군벌들이 활동하고 있고, 지역 반란이 일어나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을 수습할 능력이 없던 응우옌 왕조는 홍 강 개방을 하기가 어려웠다.

코친차이나 총독은 이 사실을 조약 위반이라하여 600명의 군대를 통킹으로 파견한다. 1882년 4월 25일 당시 사이공 주둔군 사령관 앙리 리비에르(Henri Riviere)는 하노이를 기습 공격하여 점령한다. 응우옌 왕조는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구원군과 프랑스는 서로 대치하게 된다. 여기에 프랑스가 1883년 2월 증원군을 파견하고, 의회는 3천만 프랑의 추가 군사비도 책정한다.

이런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할 응우옌 왕조에서는 뜨 득 황제가 사망하고, 왕위 계승문제가 붉어지면서 점점 상황이 악화가 된다.

1883년 8월 프랑스는 통킹 지방에서 중부 지역으로 군사를 밀고 내려온다. 투언 안(順安)을 공격하여 8월 20일에 함락시킨다. 이후 응우옌 왕가가 머무르던 후에에 진격하자 응우옌 왕조는 휴전을 요청한다. 아르망 조약(제1차 후에 조약, 계미조약癸未條約)을 채결하여 프랑스는 베트남의 보호국임을 인정하고 대외 관계는 프랑스를 통해서만 하기로 한다. 대신에 응우옌 왕조의 지배자와 관료들의 지위는 유지시켜 주기로 하였다.

아직 종주국으로 생각하고 있던 청나라는 아르망 조약을 무효로 선언하고, 베트남 북부의 흑기군과 연합하여 프랑스 군에 대항하면 베트남에서 물러가지 않는다. 이에 프랑스는 1883년 12월에 대규모 원정군을 지원하고, 청나라 군과 흑기군을 베트남에서 물러나게 한다. 1884년 5월 리홍장은 프랑스와 텐진에서 강화조약을 맺고 철수하기로 약속했으나, 이를 빌미로 청나라에서는 강경파가 권력을 잡아 다시 충돌하게 된다. 이렇게 청불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런 시점에 프랑스는 내각이 붕괴 된다.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1885년 6월 2차로 텐진에서 조약을 채결하고 1884년 리홍장과 맺었던 조약을 계승키로 한다.

청나라까지 베트남에서 물러나면서 완전히 베트남은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물론 응우옌 왕조는 남아있었으나 명목상일 뿐이었다.

출처 : 새로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 지음, 2002년 이산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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