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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힘쓴 판 보이 쩌우 본문

역사/베트남의 역사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힘쓴 판 보이 쩌우

무량수won 2009. 5. 28. 00:27
판 보이 쩌우는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민족 운동가이다. 1885년에 근왕운동에도 참여했을 정도로 유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대불항쟁을 시작하면서 전국의 저항 세력을 규합했다.

1904년 4월, 20명으로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한다. 회장은 쟈 롱 황제의 장자 였던 까인의 직계자손인 끄엉 데를 삼았다. 끄엉 데로 인해서 왕실과 관료, 외국의 원조를 기대 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판 보이 쩌우는 책을 집필한다. 유구혈루신서(琉球血淚新書)를 통해 독립하기 위해서는 단결이 필요함을 주장하였고, 일본에 병합된 류큐의 예를 들어 독립되지 않은 것이 왜 불행한 지를 알렸다. 이 책은 관료계층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일깨우기 위해서 집필하였다.

이런 운동은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키지만, 여전히 근왕운동에 바탕을 두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베트남에 신서(新書)가 유입되면서 판 보이 쩌우도 량치차오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05년 반식민주의 재원과 무기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성공을 통해 발전하였고, 러시아와 중국에 대항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기에 이들에게는 본받고 싶은 국가였다. 4월에 일본에 있던 량치차오를 찾아간다. 그는 판 보이 쩌우에게 베트남이 처한 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국민을 일깨워 전반전 교육수준을 높여아 한다고 조언해주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일본정부의 원조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 대신 오쿠마 시게노부, 이누카이 쓰요시, 가시와바라 분타로를 소개 받았다. 이들도 무기 원조보다 인재 양성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역설하고, 베트남에서 오는 유학생을 받아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1905년 9월에 3명의 학생을 시작으로 일본에 유학생 수를 늘려간다. 이러한 시도를 동유운동(東遊運動)이라고 한다. 더불어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 해외혈서(海外血書), 신월남(新越南), 월남국사고(越南國史攷) 등을 발표함으로 베트남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려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당시 유학생의 절반 이상은 남부 출신이라 비정치적이며, 일본 유학과 프랑스 유학과의 차이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후에 동유운동이 좌절되는 내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판 보이 쩌우는 군사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느껴 유학생을 군사학교에 입학시키려 하였으나, 일본정부의 비협조로 군사학을 배울수 있는 진무학교(振武學校)에는 끄엉 데를 비롯한 몇 명만이 입학이 허락되고 대부분은 군사외의 것을 배워야 했다.

이들을 위한 유학비 조달을 위해 베트남 청년과 그 부형들에게 일본 유학이 필요한 이유를 주장하고, 찬조금을 제공하도록 요청한다. 유학비 후견을 위해 비밀 조직들이 결성되어 활동하게 된다. 또한 유학생을 통제하기 위한 베트남공헌회(越南公憲會)를 만들고, 이 조직을 통해 민주적인 훈련과 유핵생 간의 유대의식을 길렀다.

이런 와중에 1907년 중부지방 농민들이 과도한 세금에 반발하여 운동을 일으켰고, 꽝 응아이, 응에 안, 하띤, 타인 호아 등지로 번져갔다. 이런 여세를 몰아 1908년 6월 27일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게된다.
이 실패는 판 보이 쩌우가 주도했던 유학조직까지 붕괴시키게 된다. 일본 정부도 프랑스와의 조약 때문에 베트남 유학생을 추방한다. 유학생들은 베트남으로 귀한하거나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판 보이 쩌우는 1909년 홍콩으로 망명으로 동유운동도 막을 내리게 된다.

출처 : 새로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 지음, 2002년 이산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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