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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한 부분 읽기 - 정절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일까? 본문

독서 토론 모임

책의 한 부분 읽기 - 정절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일까?

무량수won 2010. 6. 13. 11:03

  형식은 영채의 기구한 운명을 듣고 자기의 어렸을 때에 고생하던 것에 대조하여 한참 망연하였었다. 영채는 그 악한에게 붙들려 장차 어찌 되려는가. 또는 영채의 몸을 팔아 술과 노름의 밑천을 만들려 함인가. 아무려나, 영채의 몸이 그 악한에게 더럽혀지지나 아니하였으면 하였다.

   그리고 영채의 얼굴과 몸을 다시 자세히 보았다. 대개 여자가 남자를 보면 얼굴과 체격에 변동이 생기는 줄을 앎이다. 어찌 보면 아직 처녀인 듯도 하고, 어찌 보면 이미 남자에게 몸을 허한 듯도 하다. 더구나 그 곱게 다스린 눈썹과 이마와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가 아무리 하여도 아직도 순결한 쳐녀같이 보이지 아니한다.

   형식은 영채에게 대하여 갑자기 싫은 마음이 생긴다. 저 계집이 이때까지 누군지 알 수 없는 남자에게 몸을 허하지 아니하였는가. 지금 자기 신세 타령을 하는 저 입으로 별별 더러운 놈의 입술을 빨고, 별별 더러운 놈의 마음을 호리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지금 여기 와서 이러한 소리를 하고 가장 얌전한 체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육칠 년 전의 애정을 이용하여 나를 휘어넘기려는 휼계(譎計)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선형을 생각하였다. 저 선형은 참 아름다운 처녀다. 얼굴도 아름답거니와 마음조차 아름다운 처녀다. 저 선형과 이 영채를 비교하면 실로 선녀와 매음녀의 차이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한번 영채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맑은 눈물이 고이고 얼굴에는 거룩하다고 할 만한 슬픈 빛이 보인다. 더욱이 아무 상관 없는 노파가 영채의 손을 잡고 주름잡힌 두 뺨에 거짓없는 눈물을 흘림을 볼 때에 형식의 마음은 또 변하였다. 아니다, 아니다. 내가 죄로다 영채는 나를 잊지 아니하고 이처럼 찾아와서 제 부모나 형제를 만난 모양으로 반갑게 제 신세를 말하거늘, 내가 이런 괘씸한 생각을 함은 영채에게 대하여 큰 죄를 범함이로다. 박 선생같이 고결한 어른의 따님이, 그렇게 꽃송아리같이 어여쁘던 영채가 설마 그렇게 몸을 더렵혔을 리가 있으랴. 정녕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도 송죽의 절개를 지켜왔으려니 하였다. 그러나 그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어 왔는고.
 

  영채는 다시 말을 이어, 그 악한에게 잡혀 가던 일에서부터 지금까지 지내 오던 바를 말한다.


 - 무정 - 이광수 지음. 10번째 장면 중에서...



요즘 무정을 읽는 중이다. 옛스런 말에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꽤 재미있게 읽고 있다.

형식은 장가를 가지않은 장래가 촉망받는 지식인이다. 그가 집에 돌아오자 어린 시절 어려웠을 때 자신을 돌봐주고 가르쳐 주던 은사의 딸 영채가 찾아왔다. 영채는 이런 저런 고생을 한 후에 6~7년만에 형식을 만났다. 영채의 집은 망했고, 그녀를 돌봐주던 외가는 그녀를 구박하기 일쑤였다. 이에 영채는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서 여자 혼자의 몸으로 고생한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다.



어떤 인간인들 치사하지 않고 옹졸하지 않겠느냐만은 이 부분을 읽어나가면서 형식이란 인물에 대해서 그러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글이 쓰여진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여자의 정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무어라 할 수는 없다. 다만 은사의 딸인 영채의 정절이 있느냐 없느냐로 사람을 드높였다가 한순간 바닥으로 뭉그려뜨리는 그의 생각의 변화에 잠시 화가났다.


나는 고귀하고 절대 속물이 아니라고 말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을 마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겉모습으로 받아들이는 형식에 대해서 조금 화가 났다.



아직 소설은 보고 있는 중이다. 결말이 어찌될 지는 모르지만, 소설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열이 나서 슬쩍 적어둔다. 오랜만에 감정 이입이 되면서 읽게되는 소설인 것 같다. 독특한 독서습관 덕분에 아무리 재미나게 읽어도 언제 다 읽을지 알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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