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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교실, 그 잔혹한 이야기 본문

문화 컨텐츠 연구/드라마와 애니 감상기록

여왕의 교실, 그 잔혹한 이야기

무량수won 2013. 4. 4. 10:10

제목이 먼저 떠올랐다. 보통 글을 쓰지도 않았는데 제목이 생각났다는 건 이미 주제와 이야기의 구조가 머리속에서 잡혔다는 뜻이 될 때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드라마를 보는데 그 느낌이 잔혹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왜 이 드라마가 잔혹한 느낌이었는지 그것을 설명하려고 애쓰다보니  길게 끄적끄적 했지만, 나오는 글은 엉망진창이고 글이 영 이상했다. 이런 경우에 쏟아져 나오는 글에 대한 내 느낌은 추구하던 솔직함이 담긴 글이 아니라 인위적인 느낌이 강해진다. 마치 음식에 화학조미료를 쏟아 부은 듯한 느낌이 드는 그런 글이 된다.


여러번 길게 글을 써놓은 뒤 자주 글을 지우게 되는 이유인데, 이번글도 비슷한 이유로 여러번 지웠다. 그동안 끄적거렸던 양을 생각한다면 매우 아깝긴 한데, 낯부끄러운 글을 내놓고 후회하는 내 표정을 감상하는 것 보다는 그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럼이제 슬슬 여왕의 교실이 나한테 있어서 왜 잔혹함이란 단어를 던졌는지를 이야기 해야겠다. 아마 첫회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주인공 칸다 카즈미는 학교에서 새로운 담임선생님을 만난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만나자마자 난데없이 시험을 보고 그 성적에 따라 자리 선택권을 주며, 각종 차별적인 대우하겠다고 선언한다. 바로 이 부분이었다. 사회라는 것이 다 이렇다고 말하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당황하는 주인공 카즈미와 같은 방 아이들의 모습에서 '뭐 이런 무서운 드라마가 있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보냈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성적에따라 아이들에게 선택권과 허드렛일을 시키는 것이 일상이던 시절에 나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물론 매번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그런 선택권을 주는 것을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드라마와 달리 웃는 얼굴로.


게다가 아이들에게 부모들은 성적에 따라 특권과 벌을 주는 일을 서슴없이 했다. 지금도 그런 부모들이 많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 그런 대우를 선언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부모와 아이 모두가 말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드라마에서 나타났다. 드라마는 아이들에게 현실을 경험하는 예방주사로써 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 내가 자라오던 시절의 부모와 선생님들도 그런 차원에서 아이들을 그렇게 대했던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들에게는 공부 잘하는 아이는 착한아이라는 관념이 깊게 박혀있기에 공부에 집중시켰을 뿐이다. 거기에 보상과 벌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길렀을 뿐이라고 본다.





드라마 횟수가 늘어 갈수록 아이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더 잔혹해진다. 선생님은 그런 잔혹함에 대한 이유로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말 부분에 가서야 느끼게 된 것이지만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닥달하던 그 순간에 그 행복의 기준이 성적순이라고 선생님은 단 한번도 말했던 적이 없었다.


그저 성적이 좋으면 혜택이 있고, 성적이 나쁘면 허드렛일을 해야 한다고 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좀 더 편하고 특권을 누리는 것이 행복해 지는 길이라고 쉽게 생각했고, 다른 아이들과 치열하게 경쟁한다. 또한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의 친구들을 의심하고 경계하며 투닥투닥 거린다.


이 아이들의 선생님, 아쿠츠 마야의 말처럼 현실이 그리고 어른들의 세상이라는 것이 교실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이들의 점수는 어른들의 돈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허드렛일은 사람들이 꺼리며 하찮게 여기는 직업이었다. 그 꺼림직하고 하찮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어른들은 치열하게 경쟁하고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고 경계한다. 혹시나 누군가 내가 가진 것을 가져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런 어른의 모습은 어떻게든 얻어낸 특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 혹은 허드렛일을 하지 않기 위한 모습으로 아이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선생님이란 이름에 부여된 권한으로 이런 저런 횡포를 부린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자기들 끼리 경쟁 하느라 굳이 선생님이 나서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된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무리를 이뤄 자기들끼리 희생양을 만들어 횡포를 부리게 된다. 허드렛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친한 친구를 감시하고, 따돌리고,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좋은 것만 가지고 나쁜 것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싶어하는 어른들의 모습까지 아이들 세계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드라마의 내용 때문에 많이 불편했다. 괜히 화도났다. 서로 보듬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과연 저것 뿐인가하는 마음이 '그래 그렇게라도 해야지'라는 생각보다 강하게 들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 힘든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이에 대한 답은 이야기의 마지막에가서 얻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좀 더 충격적이고 좀 더 자극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세상은 인정사정이 없고,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곳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이런 현실 잔혹함을 경고하고, 조금이나마 나은 삶을 위해서 사람들 사이엔 인간다움이 필요하고 서로 보듬어 살아가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이야기는 일본 드라마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교훈을 주는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선생님의 의도는 예방접종과 같은 의미였다는 결론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드라마를 기획한 사람은 아마 그만큼 일본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는 그렇기 때문에 자꾸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인 아쿠츠 마야의 입을 통해서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아이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한마디 한마디 던질 때, 지독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 비판한다. 단순히 현실을 알려주는 듯하지만, 결국은 사회에 대한 지독한 비판에 대한 의미가 강하게 담겨있는 말들이었다.






이 드라마를 보고 담임 선생님으로 나오는 아쿠츠 마야 같은 인물이 현실에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에 그런 사람이 존재 할 수도 없고, 또한 존재한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칸다 카즈미와 같은 반 친구들처럼 좋게 적응하리란 보장도 없다. 만약 칸다 카즈미와 같은 상황에 놓인 아이라면 카즈미처럼 극복하기 보다는 자살이란 단어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꼭 그정도의 어려움이 아니더라고 해도 아이들에게 그런 극심한 스트레스를 제공한다면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어린 아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른들도 비슷한 상황이라면 똑같이 그런 충동을 느낄수 있고, 실제로도 그런 갑갑함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 유명인을 비롯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는 건 그만큼 세상살이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해지기 때문은 아닐까? 주인공 카즈미는 행복의 기준을 성적을 통한 특권유지가 아니라고 결론 내리고, 선생님이 제시한 특권과 차별에 순응하는  방법에 대신해 반 친구들의 생각을 바꾸었다. 그런데 현실도 그렇게 바뀔수 있는 것일까?


물론 성적과 비교되는 돈이란 것에 얽메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분명 있다. 하지만 한국이란 나라서에서 돈이 없다는 사실과 돈벌이에 큰 비중을 두지않는 삶을 사는 사람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그렇게 고운가를 생각해본다면 답은 쉽게 나온다고 본다.


TV에서 방영하는 성공에 관련된 프로에서 그들이 말하는 성공한 사람이 항상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거나 돈을 매우 많이 버는 사람인 것만 보더라도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행복의 기준이 돈인 것은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될 일이다. 또한 인터넷에서 그리고 부모들이 아이를 가르치는 말에서 백수라는 단어를 쉽게 욕으로써 사용하는 행위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돈을 버는 사람과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표현으로 부모들이 그리고 세상이 사람들에게 꼭 연결시킬 수 없지만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내용적인 부분과 현실을 연결시키켜서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도록 하자. 카즈미는 선생님인 마야의 그 가혹한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하고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상황은 생각과는 반대로 악화가 되어만 간다. 현실도 그렇다. 어떻게든 현실의 가혹한 굴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현실이란 단어는 좀 처럼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옭아매는 것들이 꽤 많은 사람들이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두손으로 꼭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굴레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주변에 같은 뜻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을 때 가능하다. 드라마의 주인공 카즈미도 친구들 덕분에 괴로움이란 단어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 기댈만한 친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인다. 그렇게 찾아나선다고 내 기준에 혹은 내가 내민 손을 쉽게 잡아 줄 사람이 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에서 처럼 많은 사람들은 상대를 이용하기 위해서 손잡는 척 하거나 친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배신(?)으로 사람에게 거리감을 두게 만들거나 서로 의심하게 만든다.


드라마에서는 한반으로 설정된 24명의 친구들은 손을 맞잡고 모두가 굴레를 벗어났다. 덕분에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되었고 주인공 카즈미는 학교가는 것이 매우 즐거워졌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지구상의 인구 6억 혹은 10억일지도 모르는 인구와 한국 인구만 생각해도 5천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손을 맞잡을 수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혹은 소수만이라도 같이 그 가혹한 굴레를 잊어보려고 끊임없이 친구를 찾아 다니게 되는 것은 아닐까?



드라마의 마지막편까지 보고나서 든 생각은 짜임새있게, 그리고 흥미롭게 잘 만들어졌지만 현실에 대한 문제를 꼬집기 위해서 아이들을 가혹한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안타까웠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통한 이야기로 전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봐주지 않을 만큼 세상이 건조해지고 있음에 슬펐다.


그래서였다. 잔혹한 이야기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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