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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이 시작된 이야기 본문
오타 및 글에 대한 약간의 수정 : 2015.02.26.
몇 년 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그리고 다문화 가정에 대한 거부감이 과도하게 심한 것 같다. 또한 이들의 대다수가 제대로 된 지식 없이 비난만 하고 있는 실정이라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 물론 현재 다문화 가정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다소 열악하고 슬럼화 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들의 민족성이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고 비난해야 하는 것일까?
과거에 내가 썼던 글로 이에 대한 입장은 길게 쓴 적이 있으니 그에 대한 것은 과거의 글로 대체하려고 한다. 이번에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그들이 대체적으로 정확한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이 늘어난 인과관계를 모른다고 생각되어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사실 이에 대한 것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댓글로 길게 적긴 했지만 다소 정리되지 않은 글이라서 내 생각도 정리 할 겸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2012/04/25 - [잡담 및 답변/시사잡담] - 외국인 노동자는 암덩어리인가?
2012/06/15 - [문화 컨텐츠 연구] -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옹호 글을 쓴 이유.
2014년, 한국에 외국인의 숫자가 꽤 많이 늘어났다. 이건 오래 전부터 그랬던 것이고 세계화의 여파로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은 이 때문에 사회적인 문제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왜냐면 이 외국인 중 많은 수가 한국에서 빈곤층을 이루고 있고, 세계 어디를 가든 빈곤층은 좋지 못한 문제(특히 범죄)와 잘 엮기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터넷에서는 이들에 대해 시선이 꽤 좋지 못하다.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은 현재 외국인들이 빈곤층을 이루고있고 사건 사고에 많이 얽힌다는 이유로 맹목적인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실질적인 사건 사고 비율로 보자면 한국인들이 외국인들보다 더 높은 수치를 보임에도 비난한다. 왜이럴까? 이유는 이들이 자신들과 같지 않은 피부색을 지니고 있고, 다른 말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이들은 이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이 늘어난 이유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내가 봤던 글들 대다수는 이 원인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원인에 대한 진지한 고민 보다는 이들이 한국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호도하고 이들의 범죄 사실을 더욱 크게 부풀려 이야기 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이들이 받는 혜택이 자국민보다 월등하다고만 할 뿐이었다. 몇년 전 내 블로그를 통해서 이루어졌던 댓글 논쟁도 주로 그런 식이었다. 왜 이 문제가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문제의 탓을 누구를 향해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한채 비난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외국인을 비난하는 이들만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면 사실 그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려면 꽤 오래 전부터 시사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어야 하고, 그러려면 나이도 어느 정도 있어야만 파악할 수 있어서다.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의 문제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던 1990년대 말 쯤에는 인터넷이 지금과 같이 쓰이지 않았고, 시사 문제의 다수는 다소 지루한 뉴스와 시사 프로를 통해 전해졌었다. 그러니 왠만큼 시사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 아니라면 알기 힘들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인터넷 활용도와 정보를 퍼나르는 많은 연령층이 20대 전후 세대인 것도 원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이유에 또 다른 문제기도하다. 이런 사회적 문제의 원인에 대해 정확한 이유를 아는 계층은 보통 30대 후반에서 40대쯤 되는 세대다. 정보를 아는 이들이 공감하고 열심히 글을 작성해도 이 20대 전후의 세대에서 공감해주지 않는 다면, 제대로 된 정보가 퍼지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3~40대는 생업 때문에 이 정보를 공감해도 여기저기 퍼나를 화력(?)이 많이 부족하기도 하다. 앞서 말한대로 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이들도 이 세대에서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ㅡㅡ;;
결국 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언론이 제대로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다들 알고 있겠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언론의 상태는 영 말이 아니다. 누가 혹은 어떤 언론이 이런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가 있을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도록하자. 왜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의 수가 이렇게 늘어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 문제는 심각한 도시화와 사회적 계층 형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사회적 계층 문제가 심각한 원인으로 봐야 한다. 왜냐면 여기에는 좀 더 나은 삶과 나은 대접을 받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욕망으로 망가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만 봐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에 대한 제어를 정부가 해준다면, 충분히 사람들의 욕망을 제어해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로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이 정부가 있는 이유고, 정부가 법을 집행하는 이유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과거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수치적인 경제 놀음에 정신이 팔려 이런 욕망에 대한 제어보다 욕망을 부추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민주정부 10년(김대중, 노무현 정부)이라고 하는 기간은 경제적인 몰락 때문에 욕먹긴 했지만 최초의 민간 정부였던 김영삼 정부 시절까지 포함해 인권적인 면에서 나름 성장해 왔기에 지금의 한국이란 국가가 욕망을 부추겨 망가짐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1990년대 말로 한번 돌아가보자. 한국은 산업화로 인한 물질적 풍요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 덕에 문화의 다양성이 늘어나 영화나 음악에 대한 투자가 늘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난 시장이 곳곳에 형성되었다. 한편 이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 물질적 풍요가 골고루 나눠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들이 있었다.
물론 지금에 비하면 빈부의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엔 전반적으로 도시에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삶는 큰 차이가 생긴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학을 나온 사람과 나오지 않은 사람의 사회적 인식차이도 컸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사람들을 나누게 되었는데, 그 첫째가 돈이었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좋은 학벌 및 삶의 터전(인맥)이었다. 이런 시기에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녹여낸 드라마가 예전에 방영된 한석규 주연으로 MBC에서 방영된 <서울의 달>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90년대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각인 된 것이있다. "돈이 있으면 사람들이 무시하지 않는다. 학벌이 좋으면 사람들이 무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학벌이 좋으면 돈을 쉽게 벌 수 있다." 뭐 이런 것들 이었다. 그 인식 때문에 20년이 지난 2010년 즈음 학벌을 속여왔던 연예인들과 각종 유명 인사들의 문제가 크게 터졌던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학벌은 곧 인맥이 되었고 상대를 우대해주는 조건이 되었으며 그건 결국 돈으로 이어졌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사기꾼들은 아직도 이런 학벌을 이용해 속이면서 사람들에게 많이 접근을 한다.
같은 외국인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제부터는 이야기를 좀 나눠서 해야 한다. 원인은 같지만 결과물이 다르고 서로 영향을 끼치며 나온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이런 1990년대 말 쯤, 아니 원인을 따지자면 그 이전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산업화가 막 시작되던 1960년대 말부터라고 해야 하나? 어찌되었든 한국에는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그러면서 1970년대에 급속히 늘어나는 인구수와 더불어 학교가 늘어나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대학교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대학교에 대한 허가가 쉽게 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학의 허가가 쉬워지자 대학을 가지고 장사를 하려는 무리 들이 진입하게 된다. 물론 말은 교육적인 어쩌고 저쩌고를 이야기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학교 등록금을 가지고 땅 장사나 이사장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현재의 사학집단이 생기게 된 것인데, 뭐 이건 이 이야기에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대학이 생긴다고 다 학생이 몰리게 되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만약 한국이란 나라에서 단순한 노동자로 살아도 살만하고 사람들이 무시하지 않았다면 대학으로 장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한국은 같은 일을 해도 대학나온 사람과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의 임금격차가 꽤 있었고,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을 쉽게 무시했으며,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대우해주기 보다 임금을 줄이고 노예처럼 부려먹기가 부지기수였다. 오죽했으면 사회운동하는 대학생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대학생이 아닌 척해가며 위장취업을하고 노동권과 인권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했을까? 물론 그에 대한 단점도 있긴 하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설명을 생략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부모가 자식을 대학에 안보내려고 할까? 또한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무시하고 임금도 적은 일 밖에 없는 것이 뻔히 보이는 생산직 노동을 누가 하려고 할 것인가? 또는 자식을 그런 곳으로 보내고 싶어하겠는가? 이러니 자연스레 대학 학벌이 꽤 유용한 증서가 되고 대학교를 세운 이들은 이를 통해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여파가 1990년대 말쯤 오면 꽤 커지는데, 1970년대 전 후해서 그렇게 무시당하고 살아온 젊은이들이 자식들이 대학에 보낼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1990년대 말에는 이미 20대 청년들 절반 정도가 대학을 나온 상황이었다. 그리고 2010년 쯤 가면 80%가 대학에 진학할 정도니 그 믿음이 얼마나 컸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산업 구조에서 과연 이 수많은 대학 졸업자들이 그들의 학력에 맞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존재했던 것일까? 대한민국은 앞서 말한대로 급격한 산업화로 성장했다고 이야기 했다. 다른 말로 풀어내면 수 많은 저임금 노동자들의 희생에 의해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 산업구조가 하루 아침에 바뀔까? 아니다. 국가가 경제적 성장을 하려면 그 바탕이 받쳐주는 상황에서 다른 산업이 성장하고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저임금 일을 해줄 젊은 세대들의 학력이 높아졌다. 학력이 높아졌으니 그에 걸맞는 임금이 높은 일자리를 찾아나설 것이다. 또한 그만한 자부심도 있을 테니 생계를 힘들게 끌어나가야 하는 임금밖에 주지 않는 생산직에 대졸자들이 들거가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한국의 산업 기반인 생산직에서 일할 사람들은 줄어만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공장들이다. 문제는 이 공장들이 대부분 영세하다는 것이었다. 왜냐면 한국의 산업 구조는 군사 정권에 의해서 대기업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군사 정권 다시 말해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정부 시절에 대통령 및 경제 관료 등의 지도자 층의 믿음으로 형성된 것이 대기업이 살면 밑에 있는 작은 회사들도 산다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흔히 경제언론에서는 낙수효과라고 하는데, 이 고리타분한 논리가 2010년이 넘어서서도 통용되고 있다. ㅡㅡ;; 뭐 여하튼 그런 의미로 대기업이 맨 꼭대기에서 수출 및 완성된 물건을 만들고 중소기업들이 부품을 만든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장점은 대기업을 잘만 만들어 놓으면, 대한민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다같이 잘 살 수 있다. 그래서 실제로 빠르게 대한민국 경제 규모가 성장한 것도 있다. 문제는 다 같이 잘 살게 되었느냐하는 점이다. 대기업들은 자신들이 얻은 이익을 하청업체인 중소기업까지 충분히 나눠 주어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익이 잘 나눠지지 않으니 중소기업들은 그 빈 공간을 메꾸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나눠줄 몫을 줄이게 된 것이다. 물론 중소기업 사장들이 그 작은 떡고물이라도 같이 나눠먹었으면 그나마 좀 나을 뻔 했지만 말이다. ㅡㅡ;;
여하튼 이런 구조에서 점점 일할 사람은 줄어들고 임금은 대졸자들의 기준에 못맞춰 주다보니 산업자체가 위태로워진다. 산업자체가 위태로워지니 무슨 방법을 써야 할 것인가?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많은 기업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을 강요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건 외국으로 나가거나 외국인 노동자를 들여오는 방법이었다.
취직을 하게 된 젊은 세대들의 입장을 좀 살펴보자. 대졸자는 늘어났다. 하지만 대졸자를 위한 일자리가 부족하다보니 몇개 되지 않는 좋은 일자리, 다시 말해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한 임금을 주는 대기업 일자리에 대한 자리 싸움이 치열해 지게 된다. 이 싸움에 패한 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중소기업에 취직을 하지만 그 임금격차는 날이 갈수록 벌어져서 현재(2014년 기준)는 두배 혹은 세배까지도 차이가 나는 수준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특별한 기술 없는 대졸자 및 고졸자는 월 150만원 선에 맞춰져 있다. 상황에 따라서 다르지만 적게 받으면 100만원도 채 안되게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임금이 시간이 지나도 크게 증가하지 않는 편이다. 한편 정확하지는 않지만 반면 대기업에 취직한 이들은 첫 월급을 200만원 선에서 시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2~3년 쯤 지나면 300만원 수준으로 받을 수 있게된다. 이러니 대기업을 안갈래야 안갈 수가 있겠는가?
중소기업은 대기업에서 콩고물을 왕창 빨아들이는 바람에 대기업 수준으로 돈을 줄 형편이 안되니 자연스레 100만원도 주지 않아도 불만을 가지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를 들여오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100만원과 개발도상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의 100만원의 가치 차이는 꽤 크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한국에서 미국으로 돈벌려고 불법 체류 및 단순 이민등을 하게 된 이유 등과 같다. 정확하게 이들 노동자들이 얼마를 받고 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대기업에 입사할 정원은 한계가 있고, 대기업에 취직하지 못한 상당수의 대졸자들은 낮은 임금이라도 받으려고 중소기업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일을 하게 되다 보니 수 많은 대졸자들의 임금이 떨어지게 되고 대기업 입사한 이들과의 격차는 매우 커지게 된다. 인터넷에서 말하는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를 들여와서 20대 청년들의 일자리가 줄어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와서 청년들의 일자리가 줄고 임금이 줄어든 것 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런데 아니다. 우선 대졸자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고, 그들을 위한 일자리가 충분치 않다는 것에 있다. 그러니 자연스레 사회적으로 도퇴된 이들이 낮은 임금을 형성하게 된 것일 뿐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인들로 메꿔지지 않은 생산직 일자리의 빈 공간을 메꾸기 위한 용도였을 뿐이다. 솔직히 대졸자 중에 얼마나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생산직 일자리에 가려고 할까? 또 얼마나 그들이 생산직에서 일을 하고 있나? 이 부분을 생각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결국 원인과 결과를 바꾼 상태로 인식하고 있으니 비난의 화살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의 외국인 노동자를 비난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부분을 알고 있지도 않고 바라보지도 않으며 생각하지도 않는다. 문제의 발생 원인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주 기초적인 시장원리의 개념만 어설프게 알고 있으니 제대로 알 수 가 없는 것이고 그들의 주장에 담긴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이건 우리 사회 교육 문제와 경제학에 대한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기도 한데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외국인 노동자가 왜 늘어났는가?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외국인 노동자들과 한국인 노동자 사이에 임금 경쟁이 되는가? 이정도만 살펴봐도 외국인 노동자들 때문에 한국의 노동자들의 임금이 낮아지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외국인 노동자를 왜 비난하나? 일단 정부를 비난해봐야 바뀌는 것도 없고 아무도 대책을 세워주지 않아서다. 정부 정책을 세우는 이들은 노동자보다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용자와 가깝다. 또한 이들은 노동자와 만날 일이 거의 없다. 회사 사장이라면 모를까. 그렇다고 회사 사장에게 자신의 부당함을 말할 수 있나? 어떤 간큰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인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전반적인 임금과 노동여건 개선이 이뤄지긴 힘들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신보다 저렴한 임금을 받으면서 일을 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가난하고 비난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며, 사회적으로 보호해주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쉽게 비난의 화살을 그쪽으로 날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왕따를 만드는 이유와 많이 닮아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실제적인 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들만 없었으면 자신들의 노동환경이 좋아졌을 것이라고 환상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한국인들이 한국에서 벌이는 범죄 보다 눈에 잘 띈다. 그러니 비난의 강도가 더욱 높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건 미국에서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가하는 각종 인종 차별과도 많이 연계가 된 것인데 이번에도 너무 글이 길어지니 생략하도록 한다. 이미 무지하게 긴 글이긴 하지만 말이다.
곰곰히 생각해보자. 내가 서있는 이 나라의 노동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왜 대학교를 졸업했는데도 한달 한달 버티기 힘든 임금밖에 못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이것이 왜 내 실수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인 것인가? 누가 이 문제를 만들었고 왜 이렇게 조장을 했을까? 답은 기득권을 손에 쥐고 있는 소위 엘리트 계층의 어른들이고, 그들의 친구들인 대기업 총수 같은 이들이 만든 것이다. 비난을 화살을 날릴 것이라면 괜히 같이 고생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기득권 층에게 날려야 하는 것이고, 또한 그래야만 사회적으로 당신이 제대로 된 임금이 지급되도록 만들어 한달 한달 간신히 버티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꿈꾸고 여유로움을 즐기게 할 것이다.
글이 많이 길어졌다. 그래도 이미 이야기를 기왕에 시작했으니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이야기까지 마무리하고 끝내야 할 것 같다.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1990년대에 심각한 사회문제로 불거진 농촌총각들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한국의 대다수 다문화가정이 생긴 이유가 이 때문이다. 앞서 말한대로 1990년대에는 풍요와 더불어 사회적 격차가 생겼다고 말했다. 거기다가 농촌의 이미지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못살고 힘든 곳이라는 것이 강했다. 실제로 70년대와 80년대에는 그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농사를 포기하고 서울을 비롯한 도시로 옮겨갔다. 그러니 1990년대는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매우 좋아졌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가난함과 힘듦은 농촌 사람들에게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도 농촌에서 산다고 하면 본능적으로 꺼리게 되는 것이다. 여자를 혐오해가면서 여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이 때쯤 되면 등장할 텐데, 이건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인식이었기에 여자를 비난할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다보니 농촌에 남은 젊은 이들은 나이든 노총각이 되기 쉽상이었고 이는 사회적인 문제로 번지게 된다. 그런 와중에 해외에서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일이 늘어나게 된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가 고민이 되는데, 이렇게 시집을 오는 여자들도 실질적으로는 한국의 여자들과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시집을 오게 되었다고 보면된다. 무엇이냐면, 자신이 서있는 나라에 있으면 가난과 고됨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지만 한국이란 나라는 돈 많은 부자라라의 이미지가 있으니 농촌이 힘들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있던 나라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한국에서 신부를 구하지 못한 농촌 총각들은 신부를 구하러 동남아시아와 러시아 등지로 날아가게 되고, 그렇게 대한민국에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게 되지만 사회적인 잘못된 가치관과 인식이 이런 문제를 만들었다. 문제는 이 다문화 가정이 점차 줄지않고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젊은이들 전반적으로 결혼 이후의 삶이 어려워져서다. 처음에는 "농촌의 삶이 어렵다" 정도였지만 이제는 "결혼 자체가 삶을 어렵게 만든다"는 인식까지 더해진 것이다. 특히나 지방의 경우는 생활에 대한 어려움 인식이 더 심하기에 농촌을 비롯해 지방 소도시까지 다문화 가정이 급격하게 늘어나게 된 것이다.
다문화 가정에 대한 비난에 대한 대부분은 사실 다문화 가정 자체가 사회적 문제를 일으켜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와 더불어 곁다리처럼 들어가 문제가 불거지는 경향이 크다. 다만 다문화 가정에 대한 비난을 하는 이들이 들고나오는 자료와 이야기는 종종 사람들을 호도하고 현혹시킨다. 한국에서 사회적 배려 정책이 문제가 되는 것은 내국인들에 대한 배려가 이뤄지지 않은 채 외국인들을 대상으로만 나오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외국인 노동자나 다문화 가정 모두 가릴 것 없이 공통적으로 이루어지는 비난인데, 이 문제의 핵심을 잘 살펴봐야 한다.
앞서 말한대로 다문화 가정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은 한국 사람들이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지 않다. 우선 말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른 곳에서 살기에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한국 사회의 빈곤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잠깐 이야기 했지만 사회적인 빈곤층은 범죄와 꽤 쉽게 연계되고 심각해지기도 한다. 정부에서 복지에 힘을 쓰는 이유는 이런 빈곤층들이 범죄와 이어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 이유도 크다. 빈곤층의 경우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회에서 안아주지 않는다면, 결국 사회 제도에 대한 불만 세력이 되고 그 불만이 범죄로 쉽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흔한 외국인에 대해 비난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외국인 범죄를 줄이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조건 쫒아내야 하는 것일까? 이들을 모두 쫒아내면 그 빈자리에 대한 대책은 어떤 것이 있나? 그 누구도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이나 방법 따위른 내놓는 이는 없다. 주구장창 단속만 하란다. ㅡㅡ;; 여태 외국인을 향해 비난했던 사람 중에 그에 대한 방안을 이야기 한 사람을 인터넷 곳곳을 떠돌면서 본적이 없다. 다만 이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외국인이 늘어나면 한국 사람들이 설 자리가 줄어들게 된다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만 강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결국 외국인이 저지르는 범죄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결책은 이들을 위한 사회적인 보장이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사회적으로 당당하게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이들은 범죄에 쉽게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문제도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된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 못하고 있지만 1990년대에 한국에서 한국인 기업주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향해 가했던 수 많은 폭행과 악덕한 짓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몇몇 제도들이 자국민은 제쳐두고 외국인들을 위해서 만들어져서 거북한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외국인 탓으로 돌려야 하나? 또한 그들이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인가? 아! 물론 이자스민이라는 의원이 새누리당에 있긴 하지만 ㅡㅡ;; 그녀가 그것도 새누리당에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곰곰히 생각해보자 새누리당이다. 새누리당이 복지에 대한 지출은 그다지 하지 싶어하지 않을 일테니 말이다.
또한 그렇다고해도 한국의 저소득층을 이루는 이들에게 그 조그마한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큰일나는 것처럼 이야기할 것이 아니다. 내국인이 역차별 당한다면, 내국인을 위해 더 좋은 정책을 더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하도록 정치인을 압박하면 되는 것이다. 굳이 외국인을 위한 정책을 없애라고 하기 전에 말이다. 정책은 한국인들이 만드는데 왜 한국인들이 외국인들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면서 있는 것인가? 왜 그렇게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는 것인가? 투표권도 있고, 외국인들보다 훨씬 쉽게 정치인들과 만날 수 있으며 대화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외국인을 위한 정책에 대해 비난 하는 것은 본인을 위한 열매를 스스로 따지 않는 어른이 다른 사람이 키가 닿지 않아 열매를 따지 못하는 아이 것이 부러워서 아이를 향해 욕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자국민들을 우습게 보고 제대로 대중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부정하면서까지 뭐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짜피 둘 다 손으로 열매를 쉽게 딸 수 없다면, 비난의 화살을 열매를 주는대로 받아 먹는 아이를 향해 할 것이 아니라 어짜피 따줄 것이라면 공평하게 따달라고 열매를 따는 사람에게 화살을 날려야지 더 나은 것이 아닐까? 그래야 내 손에 열매가 돌아올 차례가 오지 옆에 힘없는 아이를 때리고 욕한다고 열매가 내 손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불어 그래서도 안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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