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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outsider의 생각누리

무정 - 이광수 본문

독서 토론 모임

무정 - 이광수

무량수won 2010. 9. 3. 18:51








드디어 무정이라는 소설을 다 읽었다. 나에게 있어서 무정은 중국 공산당이 했다는 대장정 같았다. 읽고 읽고 또 읽었지만 도통 연결해서 볼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들이 도망을 치다 자리 잡을만하면 장개석에게 쫓겨 도망가기를 반복하던 시절처럼 오랜 시간 책읽기에 집중하기 힘들었다는 말이다. 당시 중국 공산당들은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만나서 장개석과 화해하고 '타도하자 일본'을 외침으로서 상황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들처럼 나도 책 읽는데 책과 나 사이에 어떤 공동의 적이 있었느냐고? 그런게 있으리 만무하다. 굳이 하나 꼽자면, 나는 책을 읽고난 후에 느낌을 적어야한다는 '괴팍한 적(?)'이 존재할 뿐이었다. 어쩌면 책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적일지도 모르겠다.  
ㅡㅡ;;;

어찌 되었든 열심히 무정을 읽었다. 길고 지루했다. 앉은 자리에서 모두 읽지 않는 독특한 나의 책 읽는 습관이 길고 지루함을 더욱 늘려주었으며, 덕분에 조금 읽다가 지치는 상황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누가 돈을 주지도 않는데 내가 왜 이 책을 이렇게 열심히 읽어야 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누가 나에게 내준 과제물도 아니고...





지루하고 길다는 불평 불만을 쏟아내면서 끝까지 읽었던 이유는 그 속에 담겨 있던 작가의 생각 때문이다. 읽어나가면서  계속해서 투덜거렸지만 자꾸만 블로그에 떠들어보고 싶은 부분들이 머리속을 떠돌았다. 그 생각들이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책의 한 부분 읽기"라는 포스트를 통해서 내 블로그에 나타났다. 그렇게 내 느낌을 적어가면서 무정을 읽어나갔다.

책이 쓰여진 결론을 한단어로 하자면 그것은 계몽이다. '이 무지하고 가난한 나라를 위해서 우리는 배우고 공부해야한다. 우리가 배우고 공부한 것을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활용해야한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하자.' 뭐 이런 내용이다.

계몽은 일제 강점기에 등장한 조선 소설의 중요 단어였다. 조선만 그랬을까? 당시 계몽이란 단어는 조선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에 힘들어 하던 나라들은 모두 중요하게 생각했다. 때문에 자신들의 동포를 바라보던 전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이 사람들을 계몽하려고 애를 썼다. 러시아의 많은 지식인들도 그러했기에, 막심 고리키는 어머니란 작품 안에서 계몽이라는 사회적인 이야기를 담아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니 마지막 부분에 도달하기 전까지도 나는 이 소설을 사회적 의식이 녹아있는 연애소설로 읽었다. 분명 계몽하자는 것이 마지막에 나를 노리고 있을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을 했다. 어쩌면 이광수가 써 놓은 이야기에 제대로 속은 것일수도 있고,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 불투명한 안경쓰고 보았던 것일수도 있다. 모두 알면서 혼자서 딴길로 빠져버린 것이다. 아마 연애소설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듯 하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내용은?





< 사진 출처 : 위클리 경향 >



대충의 줄거리는 이렇다.

이형식이란 사내가 등장한다. 일본 유학파이면서 조선에서는 알아준다는 지식인 중 하나다. 이 사람이 잘나서 일본 유학을 다녀온 것이지만, 그의 뒤에는 그를 도와준 사람이 하나 있었다. 부모도 형제도 희망도 남아 있지 않던 이형식에게 새로운 학문을 가르쳐주던 선생님. 그분의 딸인 영채가 어느날 갑자기 형식을 찾아온다.

영채는 자신의 아비가 농담으로 던졌는지 진심으로 던졌는지도 모르는 말 한마디 때문에 이런 저런 고생을 겪으면서 정절을 지켜왔다. 그것도 기생을 하면서... 영채는 아버지가 영채의 짝으로 형식이 좋겠다고 했던 그 한마디 때문에, 세월이 주는 고난 속에서도 형식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던 것이다. 영채의 집안은 형식이 떠나고 망했기에 그녀로써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 영채가 형식이 서울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형식을 찾아왔다. 하지만 형식은 영채가 혹시 기생이 아닌가 싶어서 그녀를 기쁘게 환영하지 못한다. 형식은 그녀가 기생이라면, 정절을 잃어버렸을 것이란 생각으로 그녀를 따스하게 반기지 못한다. 그저 반가운 이를 만나러 온 영채였는데 그녀의 신분을 의식한 것이다.

이에 실망한 영채는 자신이 머무는 기생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기생어미의 농간으로 성폭행을 당하게 되고, 뒤늦은 후회를 한 순간 형식이 영채를 찾아와 영채가 위험해진 상황을 막았지만 형식은 여전히 영채의 마음보다 영채가 정절을 잃었나 잃지 않았나에만 관심을 가진다.



영채는 이 사건으로 수치심을 느껴 자살 하려고 평양으로 돌아간다. 형식은 그런 영채를 따라가지만 결국 영채를 찾지 못해 그녀가 죽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가 죽었다는 생각에 빠져있을 때, 마침 영어 과외를 하던 집안에서 형식을 사위로 삼겠다고 연락이 온다. 사위가 되면 자신의 딸과 함께 미국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형식은 이 제안을 받아 들이고 약혼녀인 선형과 같이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한편 영채는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일본에서 공부던 여성을 한명 만나게 되는데, 그녀의 설득에 의해서 자살 생각을 버리고 그녀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영채를 도와준 이의 이름은 병욱이고 일본에서 새로운 학문을 배워온 신여성이었다. 그녀와 같이 지내며 많은 생각의 변화를 느끼게 된 영채는 병욱의 도움으로 병욱과 같이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형식의 미국 유학길과 영채의 일본 유학길이 한 기차안에서 이뤄지는 우연이 발생한다. 이에 형식과 영채, 선형과 병욱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들이 우연히 한 기차에 머무르며 각자 나름의 생각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을때 마침 일어난 홍수로 기차가 잠시 정차하게 된다. 기차에서 내린 그들은 한 여관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게 된다. 쉬면서 물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보고 있던 그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들을 돕기로 나선다.

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돕다가 그들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된다. 과거의 인연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열심히 공부해서 저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 그래서 신음하고 있는 조선을 위해서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개인적인 감정이 모두 해소되고 외국 나가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다. ㅡㅡ;;;





내가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이야기 마지막까지 개인 감정을 열심히 이야기하던 작가가 마지막에 '그딴건 개나줘버려~' 라는 식으로 결론을 맺어 버린것이었다. 물론 계몽을 염두해두고 쓴 것이고, 중간에 계속 계몽 소설임을 알리는 징후들이 많이 나타난다.

하지만 결론을 꼭 우리 모두 열심히 공부해서 계몽하자라고 외쳤어야 했을까?
이것은 1910년대 후반에 정절을 그것 따위라고 치부해버리는 개념과 지식인들의 역겨운 권위의식 등의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아니 엄청나다고 해야할까? 세상이 계몽을 외쳐야 한다고 자꾸 이야기하는데, 이광수 혼자서 나는 그런거 몰라하고 사랑이야기에 핵심을 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이해해야만 하는 점일지도 모른다.



나는 막심고리키의 어머니를 굉장히 좋게 봤는데, 이야기 속에 담겨진 이중 삼중의 의미 때문이었다. 이야기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그 이야기들이 담고 있었던 이중 삼중의 의미들이 느껴지는게 너무 좋았더랬다. 덕분에 아직도 어머니를 이야기할때 그 소설의 진짜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이광수의 무정은 그런것이 전혀 없다. 그냥 무조건 계몽으로 달려간다. 비록 처음시작은 연애소설이었고 마지막까지고 연애소설 같은 주인공들의 심리가 그려진다. 반면에 작가가 그들의 심리를 이야기 하면서 잔소리하듯 달려들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한다. 그 잔소리는 결국 계몽 소설임을 말하는 노골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아쉬웠다. 이중 삼중으로 의미를 담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연애소설로 마무리 지으면서 계몽하는 느낌을 담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말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요즘 나오는 한국 소설을 읽지 않는 것도 그들이 노골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해서인가 싶기도 하다. 많이는 아니지만 그나마 읽어본 소설들의 느낌이 그러했으니...

뭐랄까? 내 생각에는 어짜피 세상사에 관한 노골적인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보고 있으니까 어려운척 하는 소설을 읽고 싶다는 욕심이랄까?? 이런 이상한 욕심 때문에 목적이 정확하게 보이는 혹은 하고자하는 이야기가 하나만 보이는 소설에 대해서 멀리하게 된 것같다. 이건 내가 그동안 읽어본 책들에 의한 것이다. 분명 내가 읽지 않은 한국소설 중에는 이중 삼중의 느낌을 내포하는 소설이 있을 것이다.





글은 쉽게 써야 한다고 맨날 떠벌리고 다니면서 소설은 어려워야 한다고 말하는 이 잔인한 이중성 ㅡㅡ;;;

뭐 어짜피 소설속의 형식도 그 이중성 때문에 고생하고 나도 그러하고 세상이 그렇고 그런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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