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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장 지글러 본문

독서 토론 모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장 지글러

무량수won 2011. 10. 2. 16:30




원래는 지난달에 썼어야 하는 글이지만, 개인적인 사정과 여러 복잡한 감정 때문에 많이 미뤄졌다. 보통 이정도 시간이라면 책에 대한 감상을 쓰지 않는 것이 정상(?)이지만 이 책의 주제가 내 삶과 가치관에 연계된 것이기에 적게되었다.


이 책은 제목부터 목표가 보이는 책이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제목이 주는 것은 이 세상이 어찌하기에 잘못된 길로 걷고 있는 가를 묻고 있다.


책은 이런 저런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어쩌면 그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일 수도 있고, 어쩌면 무책임한 글 만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의 이런부분이 좋았다고 콕 찝어서 이야기 할 만한 부분은 없는 편이다. 오히려 이 책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서문에서 모두 나와버리고 만다. 사실상 책의 내용은 이런 쪽에서 누가 어떤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사처럼 무미건조해 보이기도 하다.  

책에서 전달하고 싶었던 내용은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으로 무장한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과 또한 그런 개념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분명 어디선가는 음식이 남아서 버리고 있음에도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굶주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유와 한국이란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과 돈 많은 사람간의 격차가 커지는 이유가 모두 같은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어 하나로 줄이면 인간의 '욕심'이고 그 욕심이 현재 한국이라는 나라와 전세계를 아우르는 개념으로는 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굳어가고 있다고 본다.  



내가 만났던 공부를 잘한다는 친구들. 그리고 돈을 많이 벌었다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돈을 버는 것은 노력했기 때문이고 또 노력한 사람에게 가는 것이라고. 만약 누군가 돈이 없다면 그건 그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약간의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꼭 도와줘야 할 이유는 없다. 세상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잘못된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들은 또한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 효율이 필요했고 이런 경쟁이 효율을 높이고 세상의 발전을 불러왔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효율을 떨어뜨리는 것들은 자연히 경쟁에서 도퇴가 되는 것이고 그들이 노력하지 않아서 성공을 못했다면, 그들의 게으름 탓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논리를 혐오할 정도로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논리에는 뒤쳐진 사람과 같이 가자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효율을 생각한다면, 세상에 남아야 할 사람은 천재라 불리우는 몇명 이외에는 모두 죽어야 옳기 때문이다. 경쟁을 하게되면 당연히 경쟁에서 지는 사람이 나오게 되고 그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면 결국은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 그렇게 세상이 이어진다면 결국 그들도 경쟁에서 반듯이 지게 될 것이고 결국은 이 세상 최고의 사람만이 살아남는 것이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맞다. 다소 내가 과장되게 그들의 논리를 확대 해석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결국은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하다보면 끝에 남는 것은 최후의 1인 이외에는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되기에 조금 확대 해석을 했다.


지금 현대의 한국 사회가 이런 논리로 무장하고 또 강요하고 있다. 1등부터 꼴지까지 줄을 세우고 이런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을 패배자라는 도장을 찍어버린다. 사람들은 그런 순위를 보고 사람들을 판단한다. 그것이 어른들에게는 돈이고, 학생들에게는 학교 성적과 학벌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점점 소수의 몇명에게 부가 집중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각종 지표에도 나타나고 있다. 중산층은 점점 사라져가고 부자들은 부가 늘고 가난한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난다.

학교의 학벌도 돈있는 집안의 아이들이 좋은 학교를 가는 추세고 돈이 없으면 학비벌기 조차 빠듯한 실정이다. 실제로 몇년 전부터 소위 스카이라고 불리는 세개의 학교에 입학하는 절반의 아이들은 강남지역의 아이들이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 즉 사회가 잘못 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탓이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몇몇 소수의 성공 스토리를 예라고 들면서 내 이야기에 반박이라고 내 놓는다. 그런데 그건 정말 소수의 이야기다. 소수의 이야기라서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고 뉴스에 나오고 그들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노력만으로 성공하는 사회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과연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을까? 아니다. 누구나 할 수있는 성공은 언론과 사람들의 눈과 귀를 끌어 당길 수 없다. 마치 2011년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대학이라는 곳에 진학하는 것 처럼 말이다. 언론들의 말을 빌리면 대학 진학률이 80%에 육박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 사람도 사람이고 당신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니 모두다 할 수 있는 것이다. 패배는 노력의 탓이라 한다. 맞다. 할 수는 있다. 그런데 사람은 모두 같지 않다. 내가 좋아 하는 것과 내 친구가 좋아하는 것이 다르고, 내가 잘하는 것과 앞집 사는 사람이 잘하는 것이 다르 듯이. 그리고 당신과 나의 생김새가 다르듯이 모두 다르다. 

다르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모두 한가지 잣대로 줄을 세워놓고 등급을 부여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이 책에서 보여주는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굶주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잘사는 나라의 서양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리도 이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 흔히 생각하기로 아니 아무생각없이 이야기 하는 것 중에 하나가 흑인은 태생적으로 게으러서 그렇게 발전을 못하고 있고, 서양의 백인들은 열심히 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잘 사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각자의 삶의 방향이 다른 것일 뿐임에도 기술적인 발전이 모든 세상의 기준인냥 들이 밀고 이야기 하는 것은 잘못된 전제다. 마치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을 그저 야만인이라고 뭐라했던 프랑스의 여배우 처럼 말이다.

뿐만이 아니다. 이런 기준을 만들어 놓은 무언가를 많이 가진 그들은 그들의 부와 힘을 축적하기 위해서 아래서 올라오는 것을 거부한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횡포를 놓는다. 개혁자 상카라에 대한 이야기가 국가별로 진행되는 횡포의 단적인 예고, 한국의 만연한 부패가 그에 적절한 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상대를 배려고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겉으로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버는 돈이 누군가의 피와 땀이 섞여있다는 생각을 하고, 내가 집어든 물건이 누군가의 피와 땀이 섞여있다고 생각을 하면 된다.

가장 단순 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가장 힘들지도 모르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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