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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의 꼬릿칸 사람들과 노숙자 본문

문화 컨텐츠 연구

설국열차의 꼬릿칸 사람들과 노숙자

무량수won 2013. 8. 6. 14:15




솔직히 말하면 설국열차에 대한 대규모(?)적인 해석을 덕지덕지 붙이려고 했다. 문제는 그렇게 쓴다고 모든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옳소!!" 라면서 박수쳐주는 것도 아니고, 나 또한 쓸데없는 기력(?)을 낭비하는 것 같아서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 하려고한다. 아마 그 하나만 하더라도 꽤 긴 글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은 있다. ㅜㅜ 설국열차에 대한 전체적인 평은 다른 블로그에 적어 두었다. ㅡㅡ;;; 나중에 내 블로그에 복사해 오겠지만, 일단은 링크로 대체한다. 



http://antidongtac.tistory.com/131



인터넷을 떠돌면서 설국열차에 대한 글을 여러개 살펴보았다. 그 중에 내 눈을 당겼던 이야기가 있었다. 꼬릿칸에 있는 사람들은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각시킨 누군가의 댓글이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꼬릿칸 사람들은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그 댓글을 보고 문득 영화에서 금발의 꼬마 여자아이가 하는 말이 생각났다. 꼬릿칸 사람들이 총리와 함께 아이들이 수업하는 칸에 들어오자 금발의 꼬마 여자 아이는 꼬릿칸 사람들은 게으름뱅이에 쓸모없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 꼬마아이의 이야기에 나는 현재 한국의 어린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부모들이 생각났다. 힘들게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요즘 부모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공부하지 않으면 너도 저렇게 된다. 돈 많이 못버는 사람들은 모두 게을러서 그래."등의 말이다. 마치 돈과 공부라는 것이 성실의 척도라는 듯이 말이다. 더 웃긴건 말이다. 그런 말하는 부모들이 사회탓은 더 많이 한다는 사실이다. ㅡㅡ;; 


뭐 그런 일이 있다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충 이런 이야기다. 그런데 이 꼬릿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댓글을 보면서 나는 한가지가 더 떠올랐다. 흔히들 꼬릿칸 사람들을 하층민 혹은 서민으로 대입시킨다. 하지만 그들이 노동을 하지 않는 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들의 모습은 서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숙자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노숙자와 꼬릿칸 사람들이 닮은 점은 그들이 지저분해서가 아니다. 우선은 노동을 하지 않고 누군가의 배급에 의지한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쉽게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꼬릿칸 사람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꼬릿캇의 구성원이 되었듯이 노숙자들도 비슷한 이유로 노숙자가 된다는 것이다. 


꼬릿칸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거렁뱅이 같은 삶을 살지 않았듯이 노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 나름의 노력으로 삶을 살아오던 사람들이다. 물론 노숙자들이 영화 속 꼬릿칸의 사람들보다 결정권한의 자유와 앞칸으로 전진할 수 있는 자유등이 더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들이 그곳에 모이게 된 이유는 꼬릿칸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노숙자들과 꼬릿칸 사람들의 차이 말이다. 노숙자들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들인 반면, 꼬릿칸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들이란 차이 말이다. 그것이 꼬릿칸 사람들을 단합하게 하고, 앞칸으로 가보겠다고 싸웠던 이유는 아니었을까? 그런 삶의 의지 혹은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이 주인공 크리스에게 응축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노숙자와 설국열차에서 꼬릿칸 사람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같이 살고자하는 의지인가 아닌가라고 본다. 같이 살고자하는 사람들이라면, 노숙자와 꼬릿칸 사람들에게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다. 노숙자에게는 노숙이라는 생활이 평생이 아닌 잠시 넘어져서 쓰러졌지만 딧고 일어설 수 있은 제도 및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한편 꼬릿칸의 사람들에게도 이런 기회를 줬어야 한다고 본다. 즉 그들이 스스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리고 열차 속에서 넘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연구했어야 된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의 대다수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스스로 보수(?)라 칭하는 사람들은 그런 배려는 노숙자들을 더욱 게으른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고 미리 걱정하고, 설국열차의 지도자 윌포드는 그들의 숫자가 많아지면 기차 생태계가 무너질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기차 밖에서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온도가 내려간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말이다. 


왜 이런 걱정을 하느냐면, 우선 이런 배려는 현재 남들보다 좀 더 받고 좀 더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현재 누리는 것을 조금 덜 누리고 덜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남들보다 더 받고 더 쓸수 있어서 빛나보이는 것인데 자신을 빛나게 하는 것이 사라지기에 두려워서 그런 배려를 할 수 없게 만든다. 또한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꺽었던 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자신의 그런 행동에 대한 타당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꼬릿칸에 살다가 앞칸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꼬릿칸의 사람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일에만 집중하는 모습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 끌려갔던 바이올리니스트가 그렇고, 프로틴 블럭을 만들던 사람도 꼬릿칸 사람들에게는 그들과 같이 생활하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 프로틴 블록을 만들던 사람을 좀처럼 꼬릿칸 사람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나마 어른들은 좀 상황이 낫다. 맨 앞칸 까지 끌려갔던 아이들은 마치 그 시절의 기억이 몽땅 사라진듯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모습으로 행동한다. 


이것을 세뇌된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지만, 반면에 앞쪽생활 다시말해 좀 더 나은 생활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보는 편이 낫다. 그리고 그 달콤한 열매를 맛본 이들은 그들의 과거를 쉽게 잊게된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어린아이들이 기계처럼 된 이유는 역시 그만큼 적응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기 쉬워서 진보와 보수의 논리로 이야기 했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의 대립이라고 봐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따지고 보면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 간의 대립이듯이 말이다. 다만 좀 다른 것이라면 영화는 비기득권층 대다수가 단합을 해서 바꾸려하지만, 한국은 비기득권층의 상당수가 기득권층에게 동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바꿀수 없다며 자학을 하면서 말이다.


나름 짦게 쓴다고 쓴건데도 엄청나게 글이 길어졌다. 


여기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꼬릿칸의 사람들이나 그와 비교 될만한 직접적인 집단인 노숙자나 모두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서 내몰린것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영화의 꼬릿칸 사람들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의지가 불타는 사람들이고 노숙자들은 그것 조차 빼앗겨버렸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꼬릿칸 사람들을 바라보듯이 노숙자들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노숙자들이 더럽다고 일단 여기저기로 쫒아내라고 아우성을 지를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재기할 수 있는 길을 좀 더 많이 만들라고 아우성을 질러야 하는 것은 아닐까? 노숙자들이 더럽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언론들의 뉴스와 설국열차를 보고난 후 누군가가 쓴 댓글을 보고 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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