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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전국 시대의 유교 - 선진유교 - 본문

역사

춘추 전국 시대의 유교 - 선진유교 -

무량수won 2010. 4. 16. 21:02
이 글은 춘추 전국 시대의 유교, 보통 선진유교라 불리우는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참고가 되었던 책의 내용이 많이 발췌되어 있으나 원본의 글을 제가 작성한 것이 아닌지라 지금은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ㅜㅜ

원래 대학 수업에서 발표를 위해서 작성된 것이며, 선진 유교에 대해서 개념잡기용으로 사용될 정도는 되나 깊은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조금 내용이 부족합니다.

원본 글에는 없는 내용을 제가 임의 대로 추가 시킨 것도 있고, 중간 중간 표현을 많이 바꾸었으나 원래 글의 중심은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혹시 이글을 읽으시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사실이 있거나 잘못된 사실이 있다면 바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불어서 글을 읽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댓글에 질문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최대한 제가 아는 지식의 범위내에서는 대답해 드리도록하겠습니다. ^^/





공자 이전의 유가는...

" 예(禮) "라는 것을 광범위한 의미의 사회 규범이라 보았다. 이 " 예(禮) "는 각종 예절과 의식의 규정뿐만이 아니라 나라와 사회의 근본 질서를 유지하는 정치 제도와 통치 질서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그 예로 주나라의 건국 초기인 무왕 때는 71개의 제후국 중에서 55개를 " 혈연적 유대 "를 통해서 지키게 하고 통치를 할때 " 예(禮) "를 준수하게 했다.

그러나 공자시기에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질서가 붕괴되어 갔고, 제후와의 혈연적 연대는 점점 쇠퇴해갔다. 사회 경제적 기초가 변화함으로 인해서 제후국 간의 관계도 변하게 되었다. 이는 결국  " 예(禮) "또한 붕괴되는 모습이 보여지게 된다. " 예(禮) "의 붕괴는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세자가 권력을 찬탈하는(아들이 아버지의 왕 자리를 빼앗음) 등의 " 무도(無道) "한 행위가 빈번히 발생하게 된다.




논어를 통해서 볼수 있는 역사적 상황


(1) 노나라 - 계손 씨는 대부의 신분으로 천자만이 향유할 수 있는 팔일무를 자기 집에서 연출하였고 노나라의 삼환(계손씨,숙손씨,맹손씨)은 제사를 마치는 의식을 거행할 때 천자만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옹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2) 제나라 - 제나라의 관중은 제후만이 설치하는 색문(塞門)과 반점(反坫)을 자기 집 마당에 세웠다.



이 당시에는 천자(주나라의 왕)가 있고 그 아래에 제후가 있고, 제후 주변에 다시 신하들이 있는 모습이었다. 노나라나 제나라는 이 천자의 아래에 존재 했던 제후국이다. 이 제후국이 천자만 할 수 있는 행위를 했다면, 천자에 대한 반란이고 신하가 제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면 제후에 대한 반란인 것이 춘추전국 시대 이전의 상황이었다. 위 사례는 반란이라 치부될 수도 있었던 일들이 춘추전국시대에 들어가면서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춘추 말기의 하극상의 반란의 사례


(1) 위나라, 송나라, 진나라 등에서는 신하가 군주를 시해

(2) 초나라에서는 세자가 부군을 죽이고 군주의 자리를 차지

(3) 춘추시대에는 군주가 36명 피살, 또한 폭동과 역인의 반란 등이 발생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공자의 현실 인식에서 통치 질서가 와해되고 사회 규범이 붕괴되는 변란의 시대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 깔려있음을 의미한다.



전국 시대의 상황


전국시대에는 " 천하무도(天下無道) "가 더욱 심화된다. 전국 시대에 살았던 맹자는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고 심경과 수리 관개(농사에 관련 된) 사업이 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농지에서 나오는 농산품의 생산량이 급격하게 상승하게되고,  결국 이러한 생산력의 상승이 사유(개인소유의) 농경지가 출연으로 연결되어, 소가족 단위의 농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권력이 분산되어 있던 봉건제 국가에서 중앙 집권적 " 영토국가 "로의 이행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서 사람들 사이에 토지 소유의 불균등을 촉진 시키게 된다. 이로 인해서 170개의 나라가 존재 했었던 상황이 7개 국가로 줄어들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들은 "7웅(雄)"이라 불리게 된다.

이런 시기가 지나면서 교전의 횟수나 전술적인 대응등이 바뀌게 되는데 춘추시대에 전차전 이 중심이었다면,  전국시대에 보병 전으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각 나라의 병력이 증가하게 된다. 이 병력의 증가로 인해 농민들의 피해의 양산은 커지게 된다. 이로 인해서 농민들의 삶은 피폐해져갔다.



예(禮)를 통한 질서의 회복과 그 정치적 표현


공자가 파악한 사회의 문제점


첫째 : 주 왕실과 제후간의 관계를 보면 당시의 제후들이 주왕의 권한을 무시하는 월권행위를 하고 있었다.

둘째: 제후와 제후간의 관계를 보면 강대국의 제후들이 약육강식의 쟁탈전을 통해 약소국을 유린하였다.

셋째: 일국 내에서 군주와 기층민과의 관계에서 군주들이 전쟁 물자 조달과 사사로운 부귀를 목적으로 징병․부역․공납을 통하여 참혹할 정도의 착취를 하고 있었다.



공자가 생각한 사회 문제의 해결 방안


첫째: 공자는 주 왕실과 제후간의 관계 재정립을 위해 " 정명(正名) "과 " 극기복례(克己復禮) "를 내세운다.

공자는 주나라의 문화적 번성과 사회적 안정은" 예(禮) "의 준수와 제후간의 " 혈연적 유대 "덕분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 예(禮) "의 회복이 바로 춘추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공자는 " 예(禮) "라는 것을 사람의 행위 원칙과 윤리 규범을 의미한다고 보았고 따라서 " 예(禮) "를 회복하기 위해서 각 계층의 사람들이 각자의 직책과 명분에 걸맞은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 정명(正名) "의 사상을 이야기 하였다. 여기서 " 정명(正名) "이란 것을 공자는 "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고 역설하였다. 이는 사회의 각 계층에서 각자의 역할을 맞는 권한을 행사하고 의무를 시행하면 사회적 혼란이 사라지고 안정이 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둘째: 약육강식의 쟁탈전을 벌이는 제후들에 대한 대책으로 공자는 " 인(仁) "과" 서(恕) "를 제시하였다.

" 인(仁) "은 완전한 인격자만이 갖출 수 있는 중덕의 총칭이며, 개별적으로는 " 사랑 "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공자는 인을 실현하면 제후국 상호간의 침탈 행위가 사라지고 주 왕실의 혈연관계였던 각국의 제후들이 다투지 않고 형제애로 교류할 때 안정된 사회 상태로 복귀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공자는 이런 " 인(仁) "’을 " 서(恕) "로 풀기도 하였다.

" 서(恕) "는 어원상 "같은(如) 마음(心)’에서 기원한다.", " 서(恕) "는 남의 이익을 나의 익과 동등하게 대우할 수 있는 공정한 마음을 뜻한다. 이는 한 규범이 보편적인 윤리 원칙으로 성립할 수 있으려면, 그 규범이 어느 한 사람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해서도 안 되면, 입장을 바꾸어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아도 똑 같이 공정한 것이어야 한다. 결국 " 서(恕) "라는 것은 소극적 의미인 상호간의 불침해에서 적극적 의미로는 서로간의 이익 교환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다.


셋째:  군주들의 기층민에 대한 잔혹한 착취 행위와 관련하여, 공자는 각국의 군주들에게 인정을 베풀 것을 권장하였다.

" 인정 "이란 기층민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여건을 보장해 주는 복지주의적인 통치관이다. 이러한 통치관은 기층민의 생존 여건 향상에 신경 쓸 것을 권고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심에 근거를 두는지 군주와 기층민 상호간의 이익 보장에 근거를 두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공자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맹자가 제시한 혼란에 대한 해결책


맹자는 " 성선론(性善論) "에 기반을 둔 " 측은지심(惻隱之心) "을 강조하며 제후국 상호간의 침탈과 기층민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멈출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군주와 기층민 간의 상호 이익 보장이라는 " 합의론적 정의관 "도 발전시켰다. 맹자는 사람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등 네 가지 잠재적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이런 잠재적 성품을 확충시켜 완전한 상태로 실현할 때 인간은 이상적인 인격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맹자는 인간의 성품을 대체와 소체로 구분하였다. 소체라는 것은 이성적 반성에 의하여 여과되지 않은 일차적 욕망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제후들이 욕심을 버리고 측은지심을 가지면 ‘인정’이 이루어져 천하가 저절로 안정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고 본 것이다.


맹자는 이익 분쟁이라는 것의 원인이 되는 ‘욕망’그 자체가 극복된다면 혼란이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仁) ․의(義) 등의 도덕적 성품을 발휘하는데 힘쓰라고 충고하거나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기층민을 돌보라는 권유를 한다. 결국 이러한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 측은지심(惻隱之心) "에 호소하여 이기심을 극복하라고 권유한다.


또한 맹자는 제후들에게 인정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천하를 얻는 방법을 인정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전국도 자연히 인정을 베푸는 왕을 중심으로 재편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 측은지심(惻隱之心) "에 호소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통치자와 기층민 간의 " 서로간에 혜택을 보는 이익 계산 "에 근거하여 " 인정 "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한다. 즉 기층민이 건재해야 통치자가 지위도 확고해지고, 기층민이 등을 돌리면 통치자의 지위도 불안해진다는 말이다. 몰론 통치자와 백성과의 관계를 이렇게 상호간에 이익을 보게 되는 계약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은 맹자보다 순자와 묵자에게서 더욱 농후하지만, 단순히 공자와 맹자만을 놓고 본다면 공자에 비해 더 계약론적 색채가 짙다. 맹자는 추목공의 일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당시 사회의 난국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단순히 성선설에 의거한 완성주의적 처방만을 견지한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군주를 설득하기 위한 방법으로 군주와 기층민과의 상호 이익에 의거한 계약론적 처방까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사상 " 인(仁) "과" 예(禮) "

공자는 " 인(仁) "에 대해 명확한 개념 정의를 하고 있지 않으며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매번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공자의 『논어』에서는 " 인(仁) "을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용기, 공손함, 관대함, 신의, 기민함, 은혜로움, 경건함, 진실함, 남을 나같이 대함 등의 덕목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 인(仁) "은 군자가 갖추어야 할 것을 모두 이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 덕치사상(德治思想) "이라 한다.


이러한 " 덕치사상(德治思想) "은 그 당시의 제후들의 개인적인 욕망의 추구와 잔혹함으로 인해 수많은 기층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지도자는 도덕적 감화력으로 백성을 이끌고 교화해서 안정된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 덕치사상(德治思想) "은 당시의 시대상의 문제의식을 여실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인(仁) "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 서(恕) "에 주목해야 하는데 공자는 " 충(忠)과 서(恕)는 도(道)에서 멀지 않다. 남이 자기에게 베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 "고 강조한다. 또한 남을 자신처럼 여기는 도덕적 관점도 강조한다. 이러한 " 역지사지(易地思之) " 의 관점에서 탐욕스런 제후들에게 제시하는 하나의 도덕적 처방이고 또한 개인의 재산 축적을 위해 가혹한 수탈과 착취를 하는 폭군들을 향한 도덕적 충고라고 할 수 있다.


공자의 " 인(仁) "" 예(禮) "를 실행하기 위한 내면적 바탕이 된다. " 예(禮) "는 사회의 외재적 규범으로서 내면 도덕이 표현되는 형식적 기제가 된다. 그래서 공자의 사상의 핵심은 이상적 사회 규범으로서 " 예(禮) "로의 복귀와 통치자의 자질로 요청되는 덕성 " 인(仁) "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조건 중 공자는 " 인(仁) "이라는 덕성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결국 외재적 형식보다는 내재적 바탕, 제도적 장치보다는 도덕적 자질에 더욱 중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맹자의 사상


맹자 역시 이러한 것을 이어받아서 " 인정론 "에서 공자의 사상과 일맥상통한 사상적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 인(仁) "에 대한 형이상학적 근거로서 " 성선론 "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 " 주례(周禮) "(주나라의 예법)의 회복에 대해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과 " 폭군방벌론 "이나 " 역성혁명론 "과 같은 과격한 정권교체까지 승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폭군방벌론 : 폭군에 대해서 벌을 주는 것. 역성혁명론 : 신하들이 왕을 바꾸는 혁명 )


또한 당시 유가의 심성론에서 줄곧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성선론에 대하여 맹자는 『공손추』편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맹자는 전국시대라는 시대 속에서 "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고 선언한 이유는 먼저 『맹자』에 기록된 전쟁의 참상에 대한 묘사와 정치․경제적 개혁에 대한 수많은 제언들로 볼 때, 맹자가 "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고 선언한 것은 나름대로의 현실적인 의도가 있을 것이며, 당신 상황 속에서 이러한 담론을 듣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 발화 수반 효과 "(성선설을 듣고 그에 따라 선한 행동을 하게 하는 효과)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4단(四端)에 관련된 맹자의 말에서 이야기 하듯이 인간의 본성에 " 네 가지 덕의 실마리 "가 내재되어 있다고 말할 때, 그의 담론을 겨냥하는 최종목표는 " 군주의 교화 "이다. 결국 성선론은 인간의 본성의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 말해진 것이 아니라, 탐욕스럽고 포악한 군주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현실적인 목적에서 말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맹자의 현실적인 의도는, 전제 군주들을 좀 더 자비심과 동점심을 가지고 통치에 임하도록 교화하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맹자는 각 제후국의 군주들에게 이러한 성선론의 기반 위에서 " 인(仁)한 통치 "를 할 것을 권고한다. 그는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 인왕 "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였다. 맹자가 이야기하는 " 인왕 "에 의한 " 인정 "은 그 당시 상황에서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춘추 시대에도 이미 인정을 베품으로 인해서 백성의 지지를 얻어 세력을 획득한 경우가 많음을 볼 때, " 인정 "이 이상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 예로 제나라의 의공이나 제나라의 진씨, 정나라의 한씨, 송나라의 악씨등은 인(仁)을 실행하여 명망을 얻게되는 이야기는 인의 베품에 따라 지지력은 확대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인정을 실시함으로써 지지 세력이 모여들게 되고, 따라서 나라의 세력도 저절로 부강해지리라는 것이 맹자의 생각이었다.




맹자의 " 인정 "의 구체적인 내용


군주 1인을 위한 개인 재산 쌓음의 제한


맹자는 자국 내에 있는 산림 자원이 군주 개인의 사적 소유물이 아니라 백성들과 같이 사용하는 공동 재화임을 말하고 있다. 물론 다른 제자들(사상가들)도 부국 정책으로 일환으로 군주의 사생활에서의 절약과 검소함등 민생 경제의 안정을 말하였지만, 맹자만큼 민본(民本)과 위민(爲民)을 이야기 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맹자는 군주가 부를 축척하면 과도한 징세와 부역으로 이어지고 결국 기층민이 군주에게 등을 돌리게 되며,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다고 하였다.




농업 장려에 의한 민생 경제의 안정


맹자는 경제 정책으로 농업, 어업, 목축업 등을 장려하였다. 이와 더불어 천연 자원의 이용과 보호를 권장했다. 맹자는 백성의 생활의 안정이 나라의 부강과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중농 정책의 산업 장려와 함께 법가나 병가의 개혁자들도 대체로 관심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맹자와 법가와 병가와의 차이점은 실제 내용에서 차이가 난다. 즉 맹자는 군주의 인심이라는 도덕 원칙에서 출발하여 백성의 생계 보장을 위한 중농 정책을 실행하지만 법가는 부국이라는 현실적 목표를 위한 세수의 증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황무지 개간을 본다면 법가는 황무지 개간과 관개 시설 축조를 대규모로 추진했던 데 비해서 맹자는 황무지 개간에 힘쓰는 자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며 반대하였다. 이렇게 반대한 이유는 경지 면적이 확대되면 조세 부담이 과중되기 때문이다. 또한 영토 확장에 대한 군주들의 야심을 비난하려는 의도도 있다.




상업 정책으로 관세의 철패와 상인의 자유로운 왕래


전국시대에는 자국의 부강을 위해 상행위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안보를 위해 통행의 자유를 엄격하게 제한해야 하였다. 그러나 맹자가 생각한 것은 상품 경제의 자유로운 유통은 정치적 할거가 청산되고 정치, 경제적 질서가 일원화됨으로써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사마천이 묘사한 것처럼 한나라에 의해 통일 되었을 때, 관세와 산택의 금지령이 해제되자 부상과 대고들이 천하를 주유하여 원하는 물건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고 한 것처럼 맹자가 바라던 관세 폐지의 이상적 내용일 것이다. 그리고 맹자와 송나라의 대부와의 대화에서 맹자가 관세 폐지를 절실한 당면 시책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관세의 폐지야말로 인정 실시의 중요한 측면이라 볼 수 있다. 맹자는 관세 폐지로 부진했던 상업 경제가 부흥하고 경색되었던 유통 질서가 개선되어 경제가 부흥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현실에서의 실패와 " 유가적인 것 "의 생명력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선진 유가 사상의 핵심은 " 인정 "과 " 민본사상 "이라 본다. 공자나 맹자는 자신의 사상을 열심히 전했지만 결국 공자는 『시경』과『춘추』의 편찬에 몰두하게 되었고 맹자 역시 왕도 정치를 실현하지 못했다. 결국 그 시대에는 현실 정치의 " 힘의 논리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맹자의 사상을 받아드리지 못하게 하는 큰 이유라 볼 수 있다. 물론 맹자가 말했던 " 힘으로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제후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 "’라 말한 것과 다르게 진나라가 무력으로 전국을 통일 했지만 결국 진나라는 얼마되지 않아 멸망하게 되고 한(漢)왕조가 15년 만에 이를 이어받게 된다. 결국 한나라는 유가를 정치의 이념으로 수립하게 된다. 이때부터 유가는 중국에서 정통 통치 이념으로 굳어져가게 된다. 이후 여러 나라들이 바뀌어 가지만 유가적 통치 이념은 중국 사회가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간다.





유가의 사상의 중요한 특징


이러한 유가가 2천여 년 동안이나 중국 사회를 지배할 수 있었던 사상의 핵심은 첫째는 정치 행위와 윤리, 도덕을 같은 연장선상에서 고려한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통치자와 지배 계급은 자기 수양과 자기 절제를 중시하고 인간 본성의 선함을 근거하여 욕망의 극복과 도덕적 완성을 강조한다.


둘째는 유가는 사회의 최소 구성단위를 가족으로 보고 특히 효를 중시하여 가족에서 확장된 공동체적 삶을 이상적인 사회로 보았다. 셋째는 법과 같은 제도적 장치보다는 덕과 교화를 중시하면서 백성이 공동체적 질서 안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넷째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이상적 가치로 추구하고, 종교나 신비적 현상에 대해 현실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며, 다섯째는 역사와 전통에 경의를 표하면서 인간의 경험에 의해 누적된 진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물질적 이익의 추구 대신에 정신적 행복과 문인적 기질을 숭상한다.




오늘날의 유가의 상황


유가 사상은 근대이후 봉건 시대의 유물로 치부되지만 문명의 변천 과정에서 다시금 시대의 문제 해결의 해법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를 건설하면서 자본주의의 시장 경제의 도입이 초래한 정신으로 인한 도덕적인 문제점을 " 현대 신유가 "라는 이름으로 해결하려는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결국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문제점을 유가의 공동체주의적 사고에 눈을 돌리고 이성 중심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철학적 노력의 일환으로 유가사상을 관심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한국을 위시한 신흥 공업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문화적 요인으로서" 유가적 도덕 "이 빈번하게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고, 경제의 위기가 초래한 형이상학적 용의자로 유가 사상을 지목하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유가라는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그 여파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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